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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후 천지가 진동할만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모귀가하였다. 이 사실을 탐지하고 사거리 주재 일경이 유상설, 고용석, 유상학, 신종식을 체포해가니 신경식, 유상능등이 대책을 논의, 익일 사거리시장일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계속하며 4열사 석방을 요구하고 일제만행에 항쟁하기로 하였다. 4일 아침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등이 서거리에서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4열사 석박을 요구하다 일헌병에게 체포되었으며 유상학, 신국호는 금포에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박광우, 오상구등 동민들과 사거리로 향하며 열렬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왜병에게 피검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만세운동은 장성 전역에 확산되었다. 신종식만 가석방되고 모두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불굴기지하고 의연히 자국의 독립만세를 제창한것이 되가 되느냐고 항변하였으나 광주지방법원서 징역 6월부터 2년가지 선고하니 불복하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여 각각 6월씩의 감형으로 유상설, 고용석은 1년 6월,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호는 1년, 유상학, 유상순, 오상구, 박광우는 6월의 징역에 처하였으니 이는 신경식, 유상능의 옥외 구명이 지대함이다. 그러나 이에 불복하고 경성고법에 상고하여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에 따른 4000년 조선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며 국가는 애민여옥하고 국민은 애국여천이어늘 조선인으로서 조선독립을 주장한것은 무죄라고 항변하였다만 기각당해 극심한 옥고를 치루었고 출옥후에도 삼짇날 화전놀이를 빙자하여 촛대봉에서 만세를 제창하며 그날을 기념하였고, 신경식은 오북의숙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그 덕성에 훈도케 하였다. 열사들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앞날을 염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조서하셨으니 애석망석로다. 원 모현동민들이 공동작업으로 위답6두락을 구입하여 열사들의 추모제를 모시다가 광복호 국가에서 훈장을 수여하고 년금까지 지급하였으나 후손들이 산재하고 성력이 못미치어 입사조두하지못하던중 군내 유림들이 열사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추모하고자 삼일계를 구성하고 위령제를 봉행하다가 신경식열사의 질인 신태호가 열사들의 의거사적을 모집하고 재판기록을 발굴하여 사적고증이 백일하에 천양되니 창사키위해 4320년 정유4월 1일 군내 유지와 유족후손 15인이 삼일사 건립을 추진하여 신태호회장이 헌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