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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함평이공 종주 기적비 이종주 의사는 본관이 함평이고 대사간 죽곡공의 13세 손이다. 부친 이학범의 3남으로 1901년 4월 12일 성내면 한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종규(鍾奎)이고 효성과 우의가 남달랐다고 한다. 흥덕보통학교를 나왔으나 일제의 강압정치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중 1920년 3·1 만세운동 소식을 접했다. 그는 성내에서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하여 3월 10일 밤에 이종철, 이대성, 유판술등의 동지들과 함께 그의 집에 모여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태극기를 만들어 이를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꽂아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날 밤 고창군 성내면(星內面) 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가져와 독립선언문 수천 매를 등사하여 각처에 배부하고 태극기 12매를 만들어 대한독립이라고 써넣은 다음, 이를 파기하는 자는 참살하겠다"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성내면사무소 구내의 공터에 꽂아 놓고 시민들의 독립운동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3월 12일 성내면장의 고발에 의하여 흥덕주재소의 일본경찰이 총검을 앞세우고 들이닥쳐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15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全州)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大邱)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내 만세운동으로 또다시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7월 13일 순국했으니 그때가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였다. 출처 : 고창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