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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전국을 방랑하며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만을 노렸다. 1923년 3월 상해임시정부에서 작성한, 일본은 우리 원수이고 이 원수를 토멸하려면 오직 철혈(鐵血)이 있을 뿐으로 우리 동포는 이 대업을 완성하는데 용감하게 매진해야 한다'는 취지를 듣고 통의부에 가입하였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함께 할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역할을 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임시정부를 후원하는데서 멈추지 않았다. 1927년에는 직접 거사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전라도 농민들의 고혈을 착취하던 동양척식회사와 관공서 은행 등을 습격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인현 오오득 김종철 조순식 오석완 송시용 전기환 정기환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함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고 총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에 여념이 없던 중 안타깝게도 1928년 6월 거사 직전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국내에서 폭탄과 총기를 구입하여 무력 투쟁을 전개하려던 선생의 계획은 일제에는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었고 우리 동포에게는 독립의 염원을 더욱 자극하였다. 선생의 정신은 마침내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크게 타올랐다. 선생은 3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31년 11월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고문 후유증과 일제의 엄혹한 감시를 피해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에서 은둔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호남 율계(律契)회장을 역임하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매진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조국의 평화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75년 10월 19일 7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슬하에 3남4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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