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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투쟁 계획을 세우고 선생의 주도로 실천에 옮겼다. 먼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동지를 국내와 상해에 밀파하여 국내 동지에게 연락과 함께 적극 호응을 종용하게 하고 세계열강에게 독립선포의 사실과 취지를 홍보하게 하며 독립선언서 및 결의문 등을 기초하게 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400여 유학생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조선독립선언식이 거행되어 선생 외 18인이 서명한 조선독립선언서가 선생의 당당한 목소리로 선포되니 우리 독립투쟁사에 찬연히 한 장을 여는 28 독립이다. 이로써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기후투쟁의 방향을 확연히 제시하였으니 큰 의의를 지니는 민족적 쾌거다. 선생은 현장에서 피검되니 31세때이다. 영어 1년여에 출감 복학 필학환국하였다. 36세에 조선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인으로 취임하여 날카로운 필봉으로 일정의 비리에 항쟁하고 민족재활의 대의를 고취하며 대중의 문화향상에 진췌하다가 필화로 2회 투옥되고 민족주의 인사의 결합체인 조선사정연구회의 조직운영을 주도하였으며 1927년 1월 독립운동전선을 통합한 신간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활약 중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 동년 12 홍문사를 설립 월간 동방평론을 펴내어 민족정기의 앙양에 전력하더니 3년만에 강제 폐간되었다. 1927년 7월과 1929년 10월 하와이와 경도에서 각각 열린 약소민족을 위한 태평양회의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구국독립의 필연성을 도도히 설파하고 일제의 잔학상을 낱낱이 폭로하여 만방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937년 동아일보 제7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폭악을 더해가는 일정에 항쟁하고 깨우쳐 가는 대중을 계도하며 싹터가는 신문화를 붇돋우더니 일제의 대륙침략이 절정에 달하고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이르러 동지의 자진폐간을 강요하였다. 선생이 완강히 거부하매 엉뚱한 구설로 선생을 구금하고 중역회의를 강압으로 경찰서에서 열게하여 중역들로 하여금 폐간을 종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폐간계에 내 도장은 절대로 찍지 않겠다고 단호일갈하였으니 무혈에도 굴함없는 굳센 의지에 감복할 뿐이다. 그 뜻이 어찌 한낱 신문의 사운여하에 있으리요. 민족을 대변하는 우리의 입이요 시대를 보는 눈이요. 세게를 듣는 귀이기에 내 몸 처럼 아끼었음이다. 1940년 8월 끝내 강제폐간되매 모진 탄압과 갖은 회유를 의연히 물리치고 오로지 시작으로 울분을 달랬으니 선생은 일정 36년을 오직 광복투쟁에 전력을 바치면서 청빈으로 일관하고 명리는 물론 일신의 안위마저 홍모처럼 여긴 고결한 지조로 시종하였다. 8.15 해방을 맞으니 57세때이다. 감격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대업에 뜻을 세워 동지와 더불어 한국민주당을 창건하고 익년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과 민주의원 및 입법의원의 활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