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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쇠하여 조선왕조가 무너지매 이족에게 강토는 짓밟히고 창생은 억눌리니 의로운 인사 혹은 의병을 일으켜 죽기로 항쟁하고 혹은 자결로써 불의에 항거하며 혹은 해외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등 지향 할 바를 몰라 할 때에 대세를 달관하고 조국의 광복을 일생일대의 사명으로 삼아 소아를 버리고 대의에 몸바친 의인이 있으니 이는 곧 근촌 백관수 선생이다. 자유의 횃불을 들고 길을 이끌며 정의의 채찍을 쥐고 가시밭 헤쳐 풍운 속에서 일생을 지났으되 산 같은 대의는 흔들림이 없었으니 만인의 숭앙 받아 마땅하다. 일찌기 호남 명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질로 13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양재 전우선생 문하에서 예교의 학에 정진하여 한학에 통효 시문과 서도에 뛰어났다.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매 비분하여 앙앙히 지나더니 19세때 후일의 평생 동주인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양 선생과의 변산 청연암 회동을 계기로 깊이 뜻하는 바 있어 결연히 구습에서 뛰쳐나 익일 1908년부터 1915년까지 군산 금호학교를 거쳐 경성법률전수학교에서 면학에 열중하니 그 사이 경술국치의 통한을 겪었다. 학업을 마치자 조선기숙청년회 간사에 취임하여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전력하면서 중앙학교에서 육영에 정열을 쏟다가 다시 큰 뜻을 품고일본 동경에 유학 명치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때마침 1차 세계대전의 종식에 앞서 미대통령 월슨이 민족자결론을 제창하매 유학생들 사이에 독립투쟁의 열기가 고조된지라 동주들과 더불어 그 열기의 조직화에 주력하다가 1919년 정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