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page


335page

만취 고공 추모비명 병서 동지를 모아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쳐 학문 부흥을 생각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주사(主事) 만취(晩翠) 고공(高公) 순진(舜鎭)이다. 공의 세계(世系)는 장흥(長興)으로 고려 절신 상서(尙書) 협(協)의 후손 성재(誠齋) 시청(時淸)의 아들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준걸하고 뜻하는 바가 고매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섬기고 아우에게 우애하여 효우(孝友)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선행을 좋아하고 의를 즐겼으며 승낙을 중히 여겨 이익과 손해로 따르고 피하지 않아 신의가 고을에서 믿음을 얻었다. 성품은 굳세고 결단성이 있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 의리에 맞게 결단하여 남은 것이 없게 하였다. 갑진년(1904)에 승훈랑(承訓郞)을 배수 받고, 을사년(1905)에 혜민원 주사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국권이 이양되었다. 이때에 면암선생이 남하하여 옥천(玉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공은 무기를 사고 돈과 곡식을 비축하여 의병소(義兵所)에 들이고, 아우 예진(禮鎭)으로 하여금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패전하여 면암선생 이 일본 섬에서 순국하니 비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를 모아 면암옹을 뒤에서 도와 책의(翟義)를 다시 경영하였으되 형세가 막히고 힘이 부족하여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족형 수남 석진(錫鎭) 및 예진(禮鎭)에게 장서를 보내 일본 오랑캐의 억압과 간악한 모습을 폭로하였다. 광무제가 갑자기 붕어하시자 원통하여 침식을 잊고 글을 지어 지역 안에 알려서 교궁(校宮)에 모여 곡(哭)하고, 기일에 맞추어 수남옹을 모시고 상경하여 곡반(哭班)에 참여하여 애통한 마음을 쏟아냈다. 이어서 소(疎)를 올려 방례(邦禮 나라의 의식)와 위호(位號 작위의 등급)가 바르지 않음을 낱낱이 말하였으나 상소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초야에 있지만 마음은 나라에 있어 밤낮으로 혹시라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잊지 않았다. 사설이 더욱 넓어져 우리의 도가 막혀가는 것을 보고 수남옹과 모의하여 고을 자제들을 명륜당에 모아 강석(講席)하는 자리를 크게 열어 경(經)과 예(禮)를 강습하고 여러 학생을 위해 오도(吾道)를 밝히지 않을 수 없으며, 이학(異學)을 배척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자세히 말하였다. 또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여 옛날에 빈흥(賓興)의 뜻과, 손님과 주인이 읍손(揖遜)하는 예절에 대하여 알도록 하였는데 행한지 3년 만에 고을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도동사(道東祠)를 세워 면암(勉庵), 수남(秀南) 두 선생을 배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향할 곳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분투하는 뜻이고 큰 업적이니 후인이 칭송하고 사모하는 바이다. 아! 일본 오랑캐가 원수가 되고 사설이 정도를 해치니 이성(彛性)을 대략 갖춘 사람들이 함께 물리쳐야 하거늘 도리어 향풀이 띠풀이 되듯 거침없이 빠져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오직 공은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시세(時㔟)를 돌아보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의리만 알고 정성과 힘을 다하여 생사를 도외시한 사람이니,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공로가 유학을 보존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림과 문족(門族)들은 공의 풍절이 혹 묻힐까 차마 두고 보지 못하고 사는 곳 종송리(種松里) 마을 입구에 큰 비석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여 추모의 뜻을 깃들였다. 공의 손자 만상(萬相), 필상(滭相)이 사촌 동생 석상(錫相)과 더불어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이가 어려 공을 미처 뵙지는 못하였으나 지절(志節)이 높고 덕의가 순수함에 탄복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기쁘게 글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국권을 훔침이여/ 힘을 다해 토복하셨네/ 사악한 학설이 정도를 좀먹음이여/ 정성을 다해 유학을 일으키셨네/ 큰 도가 이미 서 있음이여/ 소덕은 생략할 만 하네/ 무리는 시들어도 홀로 푸름이여/ 세한의 절개로다/ 맑은 운치 여기 있음이여/ 크나큰 공을 사모하리/ 우뚝한 큰 비석이여/ 후대에 말할 만 하네/ 단기 4318년 을축년(1985) 이른 봄에 거창 신사범(愼思範)은 삼가 짓는다. 손자 사위 흥양 유영석(柳榮錫)은 삼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