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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에서 갖은 약탈과 광적인 만행의 이변은 극에 달하였는지라 나라를 뺴앗긴 통한과 학정에 의분한 공은 명성의 광산김씨로 휘는 영수이고 성재는 호이니 임진년에 창의로서 정유재란때 순절하신 국재공 휘 성진의 13개 후예로 그 맥을 이어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927번지에서 서기 1914년 5월 9일 학현선생과 지산두 여사와에 독신으로 태어나 남달리 영민출중하여 일찌기 큰 뜻을 갖추던차에 일제가 서기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키자 26세의 나이에 놓칠수없는 좋은 기회라 여기고 막후에서 교란을 도모하고자 기지를 발휘하여 고창에서부터 정읍 부안 김제등지의 동지 40여인을 규합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김제에 주둔한 왜군헌을 섬멸함과 각지 경찰서를 습격하려다 가 배신한 간배에 의하여 거사직전에 발각되자 뜻을 이루지 못한 공은 은둔하며 또다시 계책을 꾀하다가 이듬해 서기 1940년12월 17일 왜관헌에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에도 굳은 결심을 굴하지 않고 미결3년을 지난뒤에야 1년 6개월의 가중형이 선고됨에 전주감옥에서 수형중 그간에 있었던 가혹한 고문의 여독때문에 염원하던 광복을 못본체 서기 1944년 2월 12일 30세를 일기로 청춘을 불살라 조국에 바치는 장렬한 순국을 하시니 오! 슬프도다. 공은 일찌기 ?성의 태어지변을 알고 생을 놓아 의를 취하여 사람위에 높이서니 어찌 장하다 아니하리요. 외아들 정기가 있기에 공이 가신 43년에야 비로소 그 의열이 세상에 빛나게되니 정부에서 독립서훈과 표창을 추서하고 국비로 묘역을 쌓아 석물의 법도를 갖추니 이에 대산면내 기관장들과 뜻있는 제현들이 주축이 되어 인의지심으로 그 찬란한 의로운 자취를 천추에 기리고자 공의 탄일에 즈음하여 추모의 비를 세우노니 청사에 빛날 의행사실의 국란호국에 충혼은 후세에 귀감이 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