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page


168page

혁혁한 위훈(偉勳)을 세우시니 이 어찌 민족정기의 발로와 진충보국의 대의가 아니리오. 의사는 22면(面)의 접전에 왜적 40여 급을 사살하고 전리병기(戰利兵器)를 다략(多掠)하야 전공을 거두는 중 사살 10여 탄창(彈槍\)하고 방장산(方丈山) 석굴중(石窟中)에 치료하시는 차(次) 노친(老親)이 왜적에게 피체수욕(被逮受辱)함을 들으시고 노친(老親)과 납치(拉致)된 동지(同志)의 석방을 위하여 자진피체(自進被逮)되어 대구에 압송된 후 피적(被賊)의 혹형(酷刑)에도 백절불굴(百折不屈)하시다가 옥중 음독(飮毒) 자결하시니 때는 경술(庚戌) 2월 8일로서 수문(壽絻) 37세이었다. 오호라! 일생에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흥적분투(興賊奮鬪)하여 천험만겁(千險萬劫)한 생애에서 조국의 광복과 구적(仇賊)의 도둔(逃遁)함을 보지 못하시고 구천(九泉)에 가시오니 평소 숭모하는 우리 고장의 비애는 자못 컸도다. 당시 의사의 유해를 대구 유림에서 수감(收歛)하여 향리인이 고창에 반묘(返墓)할 적에 각 군 유림이 연락봉송하다. 의사의 애국충의는 천하만세(天下萬世)에 영원히 빛날 사실이며 왜적의 독아(毒牙)에 탈출된 오늘날 그 위대한 공적이야 말로 다시 한 번 죽백(竹帛)에 빛나도다. 불소 본군에 이임(莅任)하여 시기에 늦은 감이 부무(不無)하나 전교 김구현(典校金九鉉)씨의 현노(賢勞)와 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