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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약년에 경사자집을 박통하고 중신에 아선자 면암선생을 사사하여 덕행문장이 남주에 중망이 되었다. 국운이 쇠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청참과 늑약작환을 위한 분궐상소마저 왜적에게 저지당한 면암 선생이 통분 끝에 자결순국을 결심할 즈음 공이 기제 수남 선생 석진 족제 예진 족질 제만 등을 보내 가향호남 창의지계를 이룩하니 실로 병오호남창의는 공의 주책에서 태동된 것이다. 병오 윤4월에 면암 선생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유생하여 충용을 고취시키고 의기를 높이 세우니 예진 제만 등은 8도에 격문을 포고하고 족제 순진은 조총 등 군기를 준비하며 공은 의종회 김재귀 등 포사 30여인과 고자성 황종관 김양수 등 사민 100여인을 인솔하여 군세를 도우니 의병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오호라 천하조아하여 국권을 회복치 못한채 의군 800이 순창에서 애닯게 무너지니 의사 정시해는 전사하고 면암 선생과 12의사는 왜병에 피압되고 공은 후일을 기약하라는 스승의 밀령에 따라 ??귀가하였다. 드디어 1908년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임공병찬 아우 수남과 함께 무신재거의를 도모하다가 사전누설되어 애석하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1914년 갑인에 고종황제로부터 독립의군부회계총관의 칙령을 받고 항왜구국에 육력분투하다가 끝내 국구사수를 갚지 못하고 경신 2월 28일에 통한의 일생을 마치니 향수 70이었다. 이같은 공의 높은 충절을 현양하여 민국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사손 기상이 공의 의적을 정석에 각하고자 아들 광철 교수를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