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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는 백성이 없어서는 안 되고 백성은 나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지난 경술년(1910)에 옥사(屋社)의 변고를 만나 백성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니 죽음을 맹서하고 식민정책에 불복(不服)하여 필생토록 조국회복을 위해 떨쳐 싸웠다. 긴 세월을 이어오다가 세월이 바뀌어 고종황제가 유폐(幽閉)된 채 갑자기 돌아가신 뒤에 신민(臣民) 된 자들의 오랫동안 쌓인 분통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엇으나 극단의 방법을 써서 조치하지 못하던 와중에 독립선언문이 경향(京鄕)에서 갑자기 선포되었으니, 바로 기미년(1919) 3월 1일 고종의 인산(因山) 당일이었다. 아, 애통하도다! 3천만 온 겨레 중에 어느 누가 이에 찬성하지 않았겠는가? 비장한 사태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우나 죽어서 군국(君國)에 보답한 사람과 살아서 광복을 도모한 사람이 일찍이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위에 기록한 제공(諸公)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안으로 경향동지들과 서로 통지하고 밖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나라 안팎으로 호응하며 민족사상고취와 독립정신앙양과 군자금조달과 한인(韓人) 관공서 관리들에게 사퇴를 경고하는 일 등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힘을 쏟았다. 전북의 모든 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주선한 사람을 망라해보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가 아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 실적(實蹟)이 상해에서 현저하게 드러나 일본이 관할하는 경찰서에서 핵심내용을 기록하였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이와 같은 장한 거사(擧事)를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사모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에 빗돌[비석]에 새겨 그 개요(槪要)를 대략 거론하여 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을 대신할 따름이다. 광복 16년 뒤, 경자(1960)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사적비 건립추진위원장 고창군수 김관묵(金寬默)은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