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page


113page

의병장 김공 순충비(義兵將金公殉忠碑) 공의 휘는 봉규(奉奎)요, 공삼(公三)이니 김해인(金海人)이다. 본군 고수면 은사리(隱士里) 출생으로 편모슬하에 어렵고 힘들게 자랐으나, 남보다 이해가 빠르고 영리하여 학식이 있었으며 외모는 큰 키에 멋있는 수염으로 타고난 자품(姿品)이 걸출했고 지기(志氣)가 강개하였다. 을미년에 왜적이 우리 황후를 시해하고 정미년에 황제를 협박하여 양위(讓位)토록 하니, 공이 분연(奮然)히 궐기하여 "신민(臣民)된 자가 어찌 국가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있으랴?" 성재(省齋) 기삼연(寄三衍)과 창의 회맹을 결성하고 복수에 선봉이 되어 정미년(1907) 9월 25일 문수산(文殊山) 전투를 시작으로 26일에 무장읍(茂長邑) 전투, 27일 고창읍(高敞邑) 전투에서 김익중(金翼中)이 전사했다. 12월 1일에 수연산(隨緣山)에서 출전제를 지냈고 3일에 성송 내원(內院) 전투, 13일 흥덕 안치(鞍峙) 전투에서 김기봉(金起鳳)이 전사했고, 28일 성재의 화를 당한 일로 김공 용구(容球)를 도통(都統)으로 추대하였고, 무신년(1908) 3월 12일에 구수산(九峀山) 전투, 4월 19일에 김용구 도통이 화를 당해 문수산 장령회에서 공을 도통으로 추대하니, 숙연(肅然)히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성재의 추모제를 올린 후 복수를 다짐했다. 다음 날 군유(群儒) 전투의 급보(急報)를 받고 원군으로 출병하여 떨쳐 싸웠으나 적군의 훈련된 군사와 화력에 대패를 당하고 고산(高山)으로 퇴각하였다. 그 후로도 항전을 지속하려했으나 적의 세력은 날로 더욱 치열하고 원군이 없어 포장(砲將) 박경래(朴慶來)와 앞뒤로 적에게 납치되어 온갖 고문에도 의연(毅然)히 굽히지 아니하니, 적이 술과 안주로 회유했으나 물리치고 욕하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놈들의 살을 씹고 가죽을 깔고 자려했으나 이지경이 되어 어찌 네놈들 술과 안주로 하루 연명(延命)을 도모하랴?"라고 하니 놈들이 할 수 없이 광주로 압송했다가 다시 대구로 감옥을 옮긴 뒤로 머리를 숙이도록 타이르니, 큰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신민으로 머리 숙여 목숨을 구걸하랴? 빨리 죽여라. 내 마땅히 여귀(厲鬼)가 되어 네놈들을 섬멸하리라."라고 하였다. 의기가 더욱 열렬하니 적들도 혀를 내밀며 감탄하고 참 의사라고 하였다. 마침내 교수형에 순절(殉節)하니 유림들이 그 충절을 흠모하여 고향으로 옮겨 장레를 치렀다. 공께서 외아들이 있었으나 손자 없이 사망함에 김옥식(金玉植)이 계속 지키고 보호하다가 진채석(陳彩錫)의 헌성(獻誠)으로 이 자리에 이장하고 군의 비용으로 석의(石儀)와 묘표를 갖추니, 오호라! 공의 당당한 그 충절은 해.달과 빛을 다투어 먼 훗날까지 빛나리라. 함평(咸平) 이돈우(李敦禹)는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