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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을 가져왔다. 그 뒤 좌우의 사상대립, 6.25동란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거쳤다. 이 시기에 지난 때의 기록이 다 없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계안도 1959년 이후에 된 것이다. 글 여러 문헌상에 나타난 단편적인 기록과 구전의 자료에 기대어 엮는다. 첫째 장학의 구실은 이러했다. 계원을 대표하여 거산은 다른 곳에 앞서 성내 소학교를 세워 배움의 기초를 닦게 했고 근우는 오산학교를 고창고보로 유관하고 가난한 인재에게 많은 돈을 썼다. 또 학당은 한때 중학교에 갈 수 없는 학생을 위해 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쓰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민족정기의 진원지로서의 구실을 하였으니 근촌은 3.1운동을 선도한 동경 2.8선언의 중심인물로 학당에 쏟은 열의 대단했으니 유학시절 그 족인 남선에게 보낸 서한에서 공적인 일이라며 일가들에게 추입할 것을 적극 권하고 가난하기에 이황 이성에 유색있어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노진용은 임시정부 전북 감독으로 군자금을 모으고 격문을 살포하다가 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또 감독부에 공이 있는 이는 운강 이종택, 소암 권우요 3.1만세는 소암과 운강이 주도하였다. 또 전통음악의 하나인 줄풍류회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3.9회라 했다가 6.2회로 바꾸어 이름붙였다. 이 모임은 육봉 황오익 인재 하영석 전황욱이 주축되었다. 대한독립사적비가 여기에 세워진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이요. 장학회도 8인으로 출발했으나 지기상합하고 공명호응하니 회원도 96인에 이르렀다. 중국 5대의 보우약은 조득모선하던 오계의 난군에서도 사재를 흩어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의 역군되게 하였고 송대에 남전으로 옮겨살았던 여대약 형제들은 고을사람과 서로 권시교휼하며 살았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생각컨데 흥동장학회원들은 수많은 관연산이요 남전의 향약을 구국의 맹약으로 바꾸어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