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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기념비 6.10독립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이던 1919년 3.1독립운동에 이어 7년 뒤에 다시 일어난 민족적 항일거사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일어나 온 나라를 격동시키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서울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26년 6월 10일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날이었다. 임금은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의 백성은 나라의 운명을 비탄하며 30만여 명이 서울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3.1독립운동때를 떠올리며 폭풍전야같이 초조 긴장하였고, 반면 일제는 무장군대까지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실제 이날을 계기로 한 만세운동은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중앙교우인 노공계의 권오설이 천도교 박내원 등을 포섭하여 추진하던 전국 규모의 만세운동은 일제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6월 7일 주모자인 권오설 등이 피검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놀란 일제는 사상단체 등을 압수 수색하는 등 더욱 경계를 강화하였다. 권오설은 5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아 순국하였고, 권오설과 같이 활동하던 연전생 권오상(중앙 17회) 역시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나왔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바로 세상을 떠났다. 6월 10일 아침이 밝았다. 오전 8시 백성들의 호곡 속에 장의 행렬이 창덕궁, 돈화문 앞을 떠나 장지인 금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8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 5년생 이선호가 도로 가운데로 뛰어나오며 격문을 뿌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이에 중앙학생과 연도의 백성들이 호응해서 독립만세의 함성은 하늘을 뒤덮었다. 장례행렬이 지나는 관수교, 을지로, 동대문, 동묘, 신설동 등에서 조선독립만세의 불길이 계속 타올랐다. 다급한 일제 군경은 만세를 부르는 학생과 군중을 짓밟으며 무자비하게 체포 구금하느라 서울 거리가 극도로 혼잡하였다. 이날 현장에서 중앙고보생 51명 연희전문생 35명 보성전문생 7명 등 일백 수십 명이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들 대부분 곧 풀려났지만 주모자 11명은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의 선고를 받아 복역 후 1927년 9월 20일 출옥하였다. 일제 검경의 조사과정에서 학생운동은 사직동계와 통동계로 각각 추진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직동계는 중앙고보생 이선호 류면희 청년학관생 박주종 연전생 이병립 박하균 경성제대 예과 이천진 등 조선학생과 학연구회 회원들이 주도하였고 민족주의계인 통동계는 중앙고보생 박용규 이동환 중동학생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이 중심이 되었다. 서울시가 만세운동 현장에 세운 기념표석에는 중앙고보생 이선호를 ‘조선독립만세’의 선창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따라서 중앙고보는 6.10독립만세운동의 선창학교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와 같이 6.10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한 세 계열이 모두 중앙고보 출신과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것은 중앙학교의 존재 의미를 새삼 부각시킨다. 그 빛나는 역사를 밝혀 기념비를 세우니 선배들이 조국 광복에 끼친 공훈과 업적은 영원하리라. 2012년 6월 10일 글 공종원. 글씨 이곤. 새김 이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