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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6월 10일은 이씨왕조 최종의 임금 순종의 인산날이었다. 순종이 망국의 한을 품고 돌아갔지만 그 영구를 봉송하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국장의식은 규모가 대단히 크고 여러가지 의장행렬이 성대하였다. 따라서 각 지방에서 많은 사람이 봉도 겸 구경의 목적으로 서울로 운집하여 10만명의 인파가 거리에 넘쳐흘렀다. 이 당시 서울거리에는 세가지의 다른 양상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 하나는 우리 민족이 의연히 살아있다는 무슨 외침이라도 터져나오지 않나 하는 은근한 기대가 일반 군중의 가슴속에 빚어지고 있었고 다음 하나는 기미년 만세운동 때에 쓰라린 경험을 한 총독부 당국자들이 만일의 경우를 염려하여 수많은 정사복 경찰과 무장군대를 장의행렬이 통과하는 요소요소와 영결의식이 거행되는 훈련원 광장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어 그 삼엄한 광경은 처참의 도를 극하였다. 또 한가지 양상은 고종황제 인산때의 만세운동의 교훈이 어제의 일같이 생생하거늘 이 좋은 기회를 헛되이 넘길 수 있나 하는 청년학도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흉중에서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건만 누가 먼저 선창하고 나서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일은 헛되지 않았다. 당일 상오 8시 반경 장장 천여 미터의 장의행렬이 창덕궁을 떠나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순종의 영구인 대여를 배송한 직후 노변에 도열하였던 학생 열 중에서 한 학생이 뛰어나와 정렬한 학생들에게 신호로 지휘하는 순간 또 한 학생이 뛰어나와 격문을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휘두르니 이에 합세한 모든 학생과 일반 군중들의 독립만세소리는 천지를 뒤흔드는듯 실로 장절 쾌절한 기세였다. 이 장거를 필두로 관수교 부근에서도 을지로5가에서도 훈련원 봉결식 부근에서도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도 차례차례로 어여를 봉송한 다음 격문 또는 전단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그러할 적마다 순사들과 기대헌병에 무장군대까지 합세하여 학생들과 군중을 좌충우돌하며 체포하는 바람에 그 현장은 극도로 혼란하여 아비규환의 처참한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현장에서 구속된 학생이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백 수십 명과 연희전문학교의 칠.팔십 명 기타 학생 수십 명이 모두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 이 6.10만세사건은 그 정신과 구호는 기미만세운동과 같았지만 외부에 지도자가 있어서 이것을 기획 지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 자의에 의하여 모의되고 실천된 것이 특기할 사실이다. 처음에 통도운동과 사직동 운동의 두 계열이 있어 전자의 주모자로 중앙고보생 이동환 박용규 중동교생 전재문 황건환 곽재형 등 27명과 후자의 주모자 중앙고보생 이선호 유관희 청년학관생 박두종 연전생 이병립 박하균 경성제대 예과 이천진 등 40여 명이 송국되어 대부분은 기소유예로 훈방되고 전기한 주모자 11명만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5년간 집행유예의 판결을 받았으나 검사의 불복으로 경성복심법원에 상고되어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1927년 9월 20일에 출옥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학생운동의 전통을 이루어 1929년 전국에 확산된 광주학생사건과 1960년의 4.19학생 혁명으로 승계되어 세계학생운동의 수범이 되었다. 그 빛나는 사적의 개요를 기록하여 후일의 귀감을 삼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