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page


51page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포악무도한 왜적으로부터 유사 이후 그 유례가 없는 굴욕적인 침략을 받아 국권을 송두리째 빼았기고 민족의 자유는 여지없이 박탈당하여 삼천리강산은 흡사히 감옥으로 변하고 2천만 동포는 누구나 포로가 되는 고초를 겪었으며 이런 무리한 탄압은 날로 심하여 우리는 거의 질식상태에 빠지고 만국강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운명은 그들 스스로가 결정지을 것이라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국내 국외에서 국권회복에 열중하고 있든 수많은 지사 선열들은 천재일우의 좋은 기호라 생각하여 독립운동을 일층 활발하게 전개시키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이 폭발하였으니 이것은 오로지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였다.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천지 진동하는듯한 이 맹렬한 기세는 적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은 손병희 선생 이하 33인이었지만 이 운동의 산파역을 맡아 하신 분은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세선생이요 모든 계획을 짜서 이것을 지휘 명령한 곳은 이 중앙학교 숙직실이었다.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 창간 45주년(1965년) 기념 사업으로 이 비를 세움에 있어 중앙중고등학교의 도움이 컸기에 고마움을 표한다. 조각 김영중 글 이희승 글씨 김응현 새임 이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