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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단군 성조 개국 이래 4천여 년의 유구한 세월을 자랑하며 지켜오던 배달의 민족과 주권과 국토를 단 한 번 35년 반 동안 외적 일본에 의해 강점 약탈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침략의 울분을 통곡하시다가 용기를 내어 기미(1919)년 3월 1일에 외치신 부조님들의 대한독립만세 함성의 메아리를 들으면서 배달 민족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 망국민의 한을 달래시던 부모님들의 신음을 보고 들으며 자라온 것이 우리 세대이다. 우리 말과 글과 성마저도 빼앗겨가며 구박당하고 수탈당하다가 마침내는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렸던 망국민의 처절한 비애와 치욕을 함께 체험한 동족 동년배의 지성층으로 일군 강제지원이란 수모를 겪은 동지단체가 우리 1.20 동지회이다. 4천명에 달했던 우리 1.20 동지들도 남북으로 갈려 살아오다가 늙고 병들어 그간 태반이 사거하고 이제 불과 기백이 살아남은 우리들이 남북 7천만 동족 특히 자라나는 후세 동포들에게 민족과 주권과 국토의 통일과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직접 체험을 통해서 입증한 것을 호소하기 위하여 이 비문을 적는다. 도대체 일본이 누구인가 미개 도래인들이 표류 정착해 온 낙도에 우리 백제 왕인 박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논어 천자문 등 언어와 서자와 문물을 가지고 건너가 전수시킨 우리의 분국이 아니었던가. 낙도 벽지에서 예의 염치도 못 배우고 구적 생활을 일삼던 배은망덕배들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저들이 우리보다 몇 발 앞서 서학을 받아들여 우리를 침략하고 청일 로일전쟁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중국 대륙을 짓밟은 후 동남아의 해상보고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간이 커진 그들은 잠자는 진주만을 기습하여 세계대전을 야기시킨 후 정신을 차리고 반격해오는 연합군을 막을 길이 없자 다급해진 그들은 우리나라 청장년들을 최전선에 총알받이로 내세우더니 마침내는 패망 전년인 1944년 1월 20일 그 당시 대학과 전문교에 다니던 우리 배달의 학생들마저 조선학도특별지원병이란 미명 아래 강제로 저들의 군문을 통해 소위 옥쇄라는 현장으로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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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입대를 피해 일시 은신하거나 자학한 동지도 많았으나 대세는 망국지노의 신세라 사지임을 알면서도 그대로 강제 입대 당한 동지들 중에는 중국의 광야에서 또는 남방의 고도에서 죽음을 당한 동지도 3백여 명에 달했는가 하면 군규에 반대 불복종하다가 군법 재판에서 장기형을 받거나 혹은 영창 생활이나 심한 폭행을 당하는 일도 허다했고 개중에는 부대를 탈출하여 많은 고초를 겪으며 중경으로 가서 우리 대한임시정부에 참여하거나 광복군에 투신하여 연합군 승리와 조국 광복에 진력한 동지도 상당수에 달했으나 그러지 못한 동지들은 국운을 기도하는 일념으로 저들 부대에 남아 갖은 수모와 고생을 인내하고 극복하면서 조국독립의 비원을 불태우며 모진 생명을 이끌어갔다. 그리하여 끈질긴 우리 민족의 투쟁은 천우를 입어 마침내 연합군의 승리로 결말을 보게 되고 우리는 해방과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국가의 주권이요 독립수호라는 체험에서 많은 동지들이 국군의 문을 두드렸고 다음으로 아는 것이 힘이라는 철학에서 너도 나도 교단에서 민족혼을 일깨워주며 2세교육에 앞장섰다. 그 밖에 나라의 치안이 시급하다하여 국립경찰에 헌신하기도 했고 정치 사법 외교와 산업경제 및 문화 종교 등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각자의 소질에 따라 국력증진과 국가발전을 위해 모두가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남북통일을 이룩하지 못했고 개발도상국의 단계에서 선진국의 문턱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동지들은 만시지탄은 있으나 일군 관계로 겪은 수난의 증언을 학병사기 네 권 속에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우리 조국과 민족이 앞으로는 결코 또 다시 지난날과 같은 수모를 겪지 않을 통일된 독립강국으로 영원무궁토록 번창할 것을 간절히 염원하는 우리 2천 7백여 1.20 동지들 이름과 함꼐 모두의 응결된 한과 소망을 이 돌에 새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