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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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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연보 1902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7일) 유관순 열사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1일 이화여자 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3.1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3월 5일 서울에서 일어난 학생단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1919년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가 3월 14일부터 3월 31일까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3월 31일에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고,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고,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이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고 그때마다 모진 매와 고문을 당했지만, 끝끝내 대한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으로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문들의 손에 의하여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된 후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47년에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에는 순국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열사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