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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출생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경기도 고양군으로 전적하였다. 1919년 3월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봉선사의 승려로 있을 때 같은 승려인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라는 명의로 동료들과 함께 격문을 만들었다. 이 격문의 취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그들은 약 200매 정도를 작성하여 인근 동리에 살포하였던 것이다. 이 독립문서의 살포사건으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9월 11일 그는 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그는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1920년에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계기를 이용하여 조직된 합법적 단체인 무산자동맹 노동공제회에 참석하였다. 노동공제회에서의 그는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 조국광복운동에 진력을 다하던 그는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북경으로 건너갔으며, 여기서 3 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결성된 조선의열단에 가맹하였다. 조선총독 등 일제의 고관 친일파 거두 매국노 등을 암살대상으로 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찰서 매일신보사 등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삼은 조선의열단에서 그는 승려신문을 벗어나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중국 북경에서 광동 지역으로 옮아간 그는 1928년에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북경 광동 등지를 다니며 무력적인 행동으로서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937년 북경 교외의 노구교에서 중 일 양군이 충돌하는 이른바 노구교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그는 현정경 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같은 해 7월에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투쟁동맹 조선혁명자동맹을 연결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광복진영의 9개 단체는 광복군에 편입되고, 그가 참여하였던 민족전선의 네 단체는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성하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2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차장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박찬익 최동오 유림과 함께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 및 외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한편 1943년 4월부터 임시정부내에는 새로 대한민국 잠행관제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설치되었다. 이 선전부에는 총무, 편집, 발행의 3과와 함께 선전위원회가 설치되어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사업과 각종 선전지도를 총괄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조소앙 신익희 등 14명과 함께 선전계획의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으로 같은 해 11월 5일 다른 임정요인들과 함께 중경의 임시정부 청사를 철수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12월 1일에는 같은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홍진·조성환·신익희·조소앙 등 13명과 이계현·서상열 외 9명을 포함한 23명이 상해를 출발 군산 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이튿날인 2일에는 서울로 들어왔다. 광복 후에는 혁신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에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