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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되던 해였다. 그때까지 미약했던 교회가 그가 6년간 목회하는 동안에 300명으로 성장했다. 그는 목회하는 한편 진주성경학교와 경남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으며 그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손양원(순교) 이정심(순교) 김재선 박손혁 한상동 등 훌륭한 목회자와 순교자들이 있다. 그가 초량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하여 일본인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1932년부터 주기철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갔다. 거기서도 그는 교회를 크게 부흥케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안감수 여사가 남편과 아들 4형제를 남겨놓은 채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얼마 후에 앞서 간 안부인의 유언에 따라 마산 의신여학교의 오정모 교사와 재혼하게 되었다. 1936년부터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성공적이고 결실이 많은 목회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시작했을 때이며 국내의 치안유지를 빙자하여 한국인에 대한 철권정치를 시작한 때였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철저하게 거부한 주목사에 대한 감시와 취체가 심하여 1938년 5월 8일 성전 건축 헌당식을 하려는 직전에 구속되어 그는 헌당식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양파 분열되어 있었다. 평양에 있던 기독교친목회와 서울에서 생긴 혁신교단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마침내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가졌던 조선야소교 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는 죄과를 범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주목사는 일사각오를 결심했다. 1938년 2월 어느날 신학교에서 다음과 대지의 설교를 했다.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총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통탄을 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한국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너에게서 떠나가는도다. 우뚝 솟은 모란봉아 통곡하여라 대동강아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라 이 미천한 목숨이나마 주님 위하여 제물로 드리리라」 과연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던 평양의 영광은 그때 땅에 떨어졌으며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의 전당이 들어서고 말았다.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주기철 목사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오정모 여사는 어려운 가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기도로써 말로써 주목사를 격려했다. 1944년 4월 21일 그는 복음의 절대성을 지키기 위하여 혼신 투쟁을 계속하다가 돌아보는 친지도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