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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목사 추모문 태산같이 믿었던 청국이 일본군에 대패하고 민비가 일인 폭도들에게 시해되고 청일로 3국의 식민지정책의 틈바구니에 끼어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마붓거리며 민심이 극도로 소란하던 1895년에 경상남도 창원군 능천면 북부리 511번지에서 소양 주기철목사가 태어나다. 그의 부친은 주현성장로요 모친은 조재선여사였다. 시골에서 개통보통학교에 다닐무렵 조국은 이미 일인의 손에 넘어갔고 많은 애국지사들은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기철목사는 기독교의 복음으로써 조국을 재건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당시 기독교신앙인으로써 조국을 위한 인재양성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던 정주 오산학교에 갔다 거기서 주기철목사는 남강 이승훈의 민족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재학시절 그는 뛰어난 재질과 감화력있는 웅변술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기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들어갔으나 안질을 앓은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중퇴하고 1921년에 평양에 있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들어가게된 동기에 대하여 그는 말했다. "참 애국은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보다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내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참 애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과연 그는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우고 애국하는 훈련을 충분히 받았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첫목회지인 부산초량교회로 갔다. 1925년 그의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