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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중퇴하고 귀향하여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의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의사로 선출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26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년간 봉직하다가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다시 5년간 봉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목사의 후임으로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신도들에게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일본궁성요배」는 결단코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민족의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언도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