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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齋 李始榮 先生 造像記(성재 이시영 선생 조상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선생은 나라의 독립과 건국에 몸 바치신 겨레의 등불이요 스승이요 법통이시다. 1869년 12월 3일 선생은 임진왜란 때 으뜸의 공을 세우신 백사 이항복 영상의 10대손이며 우찬성 이조판서 이유승 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시니 그 배움과 뜻을 세움이 남달리 바르고 큰 바탕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높은 학문에 다달아 소년 등과로 벼슬길에 올랐고 홍문관교리 외부교섭부장 평남관찰사 한성재판담장 등을 역임하시며 기우러지는 사직을 한 몸으로 떠받치려 혼신의 힘을 쏟았으나 끝내 나라는 일제에 함몰되고 말았다. 나라를 잃으매 2천만 겨레가 하나같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노여움으로 발을 구를 때 선생은 나라찾는 일이 겨레의 살 길임을 깨닫고 건영 석영 철영 회영 호영 여섯 형제분의 뜻을 모아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50여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북녘 만주 땅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떠나시니 이 거룩한 장거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금자탑이며 세계의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11년 선생은 만주 유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시니 이로써 자주적 독립운동의 횃불이 올랐다고 독립운동의 항구적 거점이 확보되었다. 저 청산리 싸움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이범석 지청천 장군을 비롯한 용감무쌍한 청년독립군이 이 신흥무관학교에서 태어났으니 배달무인의 유구한 핏줄도 여기에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3.1운동 때에는 이동녕 조성환 조완구 지사 등과 함께 중국 땅에서 불길을 붙였고 이어서 상해 임시정부수립에 앞장서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의 중임을 맡아 광복의 날까지 길잡이가 되셨다. 한편으로 한국독립당의 창당과 감찰위원장을 하시면서 중국인 황염배가 우리나라 역사를 그릇되게 쓴 책을 꾸짖어 감시만어를 저술 우리 역사의 위대함을 천명하였다. 선생은 해방과 함께 환국해서 자주독립과 대한민국을 창건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시었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 취임하셨으나 6.25 민족 상쟁의 와중에서도 독재와 부정으로 치닫는 나라 정치에 깊은 책임을 느끼시고 시위소찬만 할 수 없음을 국민에게 고하고 부통령 자리를 물러나시었다. 선생은 재야에서도 민주주의 정치의 구현을 위해 피난지 부산에서 김성수 조병옥 등과 반독재 호헌 구국선언을 하시니 이 나라 재야 민주투쟁의 첫 깃발이었으며 또 환국하시자마자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이념을 계승하여 신흥대학을 세우시니 교육자로서의 선생의 뜻을 펴신 일이다. 1952년 민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독재를 꺽고 민주정치를 실현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53년 4월 17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나시니 가뜩이나 나라 어지러운 때에 겨레의 가슴은 빛을 잃게 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에서 상해임시정부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이 나라 근대 백년 역사의 법통을 지켜오신 오직 한 분이시니 선생의 나라 사랑과 거룩한 업적에 더하여 민족 정통성의 상징으로 우러러 모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선생은 가셨어도 선생을 따르는 겨레의 마음 날로 부풀어 높으신 뜻과 이루신 일 길이 받들고 통일의 성취도 함께 염원하고자 이 자리에 선생의 모습을 새겨 세운다. 1986년 4월 17일 초대부통령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건립위원회, 명각위원장 해초 윤보선 근찬, 여초 김응현 근서, 초계 최기원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