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page


11page

선생의 호는 인촌이요 본관은 울산이니 조선조 중종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13대손으로 1891년 10월 11일(음 9월 9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우리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 굳건하게 키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 애국자요 선각자였다. 선생은 교육자, 언론인, 기업가, 정치가로서 크나큰 공적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참된 민족정신과 지도자를 육성하는 교육사업에 가장 큰 정성을 기울였다. 유학의 전통이 깊은 명문의 후예로서 선생은 일찌기 신학문에 뜻을 두고 6년동안 일본에 유학하여 근대학문을 폭넓게 섭취하며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한 과제가 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꺠우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임을 절감하였다. 귀국후 선생은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하였으며 광복이후 보성전문학교를 확대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를 창건하였다. 선생은 또한 우리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데에는 산업과 언론이 긴요함을 확신하고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동아일보를 창업 경영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본과 기술에 의한 기업이 육성돼야 민족 전체의 복리를 증진할 수 있다는것이 선생의 기업경영정신이었다. 또한 3.1운동 이후 선생이 창간한 동아일보는 민중의 진정한 입과 눈이 되어 일제의 온갖 탄압 속에서도 민족언론의 당당한 횃불로서 역사를 밝혔다. 광복 후 선생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여 건국의 주춧돌을 놓고자 한국민주당을 결성하는데 힘을 모았으며 당시 심각한 분열 상태에 있던 민족진영의 결속과 새나라 정부수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한 뜻으로 선생은 한국민주당의 대표와 제2대 부통령직을 취임하여 혼미한 정치현실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올바른 정치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으매 의연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 선생은 오로지 고려대학교 운영에 정성을 쏟다가 1955년 2월 18일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온 국민이 애도하며 국민장으로 이곳 고려대학교 뒤뜰에 모셨다가 1987년 12월 10일 유족들의 뜻에 따라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금남리 산8의 1에 천묘하였다. 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 고귀한 뜻은 겨례의 스승이 되고 평생의 사업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이 나라의 기둥으로 남아 있다. 1996년 11월 11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우회 글 홍일식 앞면글씨 김응현 제작 김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