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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살해하자 이를 계기로 온 국민이 분기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자 향리인 이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르켜 조국독립에 몸 바칠것을 결심하고 수묵리 거주 허상구 동지들과 독립운동 거사 계획을 수립하여 비밀리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 준비하여 기미년 3월 27일 이원 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당일 광목에 큰 글씨로 대한독립만세기를 만들어 들고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독립선언을 선창하며 삼백 군중을 선도하여 일대 시위운동을 하시였다. 이때 일헌병이 동지들에게 발포하니 사상자가 발생한지라 공은 격분하여 군중즐과 함께 일제주재소를 습격 주재헌병을 처단하고 주재소를 파괴 방화한 후 동지들을 구출하셨다. 다시 군중을 선도하여 옥천 일헌병대를 급습하던 중 대전에서 급파된 일헌병과 교전하다 피체되셨다. 그 후 온갓 고문과 형고에도 불구하고 굴함이 없이 항거하시다 공주형무소에 8인의 동지들과 함게 3년의 옥고를 치르시면서 옥중 만세의 선봉이 되여 독립의지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출옥후에도 독립의지의 굴함이 없이 향리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인 창씨개명에도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셨다. 정부에서는 공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며 서기 1977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자고로 국가흥망의 역사 위에는 애국지사들의 조국애에 넘치는 고귀한 자기희생이시었다. 오늘날 선열들이 남기신 업적은 길이 천추에 빛날 것이며 만세에 전하는 유지는 영원히 민족의 맥박속에 되살아 민족정기를 크게 북돋을 것이다. 공의 높은 독립정신은 민족이 한결같이 추모하고 후손에게 귀감이 되여 길이 빛나리라. 단기 4317년 1월 일 옥천군수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