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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직시하고 우국충절을 표함은 국민된 도리이며 국가의 소명이다. 황차 스스로의 의기로 국난극복의 선봉이 되였음은 실로 충성된 양심의 발로이다. 일당 허상구 공은 경술국치 이후 민족의 개화만이 조국광복의 첩경이라는 자각과 신념으로 1916년 서울 중동중학교에 진출 신학문을 면수하는 한편 재경 각 학원으로 구국동지들을 규합하기에 전력하시였다. 폭악무도한 일제가 고종황제를 시살하자 이를 계기로 온 국민이 분기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자 공은 1919년 3월 1일 탑동공원의 선언식에 학생대표로 동지들과 함께 참여하였고 수차에 걸친 시위운동을 하였다. 이어 향리에서도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하향하여 지방의거를 전개하였다. 동월 13일 동지인 안준과 영동 시위운동을 주도하셨으며 동월 23일에는 홍태식 동지와 함께 청주 시위운동을 선도하시였다. 사택에서는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가한 사형 상기 상회 공과 같이 향리에서 거사할 것을 발의하고 이원시일인 동월 27일 참집 군중 3백여명을 이끌고 일대 시위운동을 감행하시였다. 공은 분격한 나머지 일헌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임헌상등병 기시모도(안본이작)와 그 수하를 처단하고 주재소를 파괴 방화한 후 옥천으로 진입하여 일헌병대를 급습하던 중 대전에서 급파된 증원대와 교전하다 반위피체되시였다. 이후 온갖 고문과 형고에도 불구하고 굴함이 없이 항거하시더니 마침내 1945년 8월 조국의 광복을 맞으시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 3월 1일 공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리며 건국공로 대통령 포상을 추서하였다. 이원역전광장의 기미 3.1운동기념비와 징표를 달리하여 여기 송적비를 근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