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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태영 위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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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징용·징병 등 갖가지 명목으로 한국인을 침략전쟁의 일선으로 끌고 갔다. 그는 소위 해군애국작업단원(海軍愛國作業團員)으로 남태평양의 오리마이제도(諸島)에 끌려가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노동하던 중, 병을 얻어 1942년 3월 21일 귀국하였으며, 1943년 2월경 일제의 살인적인 식량공출에 분격하여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44년 3∼6월 자신과 김수동(金水同)의 집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13차례에 걸친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일경과 식량공출 담당직원을 처단하고 철로에 멍석을 깔아 일본군병력 수송열차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또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歌)와 '조선청년들아 단결하자'라는 내용의 벽보를 써붙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로 하였다. 이와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과 연락, 독립전쟁을 펴기 위하여 자신들이 일본군에 입대한 후 전선(戰線)에서 일본군을 반격하는 방안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다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44년 7월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일로 인하여 그는 1945년 5월 2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동년 7월 20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