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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하였고 여기에서 위 황공을 포함한 우리 측 제의사들의 항전에 부딪쳐 실패하자 바로 이어서 이번에는 보다 많은 군세를 투입하여 이곳을 공격하였던 것이 아닌가. 당시 전란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나 후세의 사가들이 한결 같이 다 이현의 승전을 역사적인 대첩이라 평하고 그 승전의 주장 황진을 뛰어난 무장으로 추대하였던 이유도 다 이러한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황공은 이듬해 6월의 저 유명한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의 명장으로서의 이름을 남기지만 그의 명장으로서의 진가는 이미 이현전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싸움이 끝난 후 공이 동북임지로 가기 위하여 전주를 거쳐 갈 때 시민 남녀노소가 제각기 음식을 손에 들고 앞을 다투어 연도에 나와 이분이 아니었던들 이 지방 생령들은 온통 몰살당하였을 것이라 하며 감격의 눈물로 영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거니와 이현전 일년후인 계사년말에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겸병마사수군절도사 이정암이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충청병사 황진은 용무가 초군하고 여력이 과인하였는 바 웅치전에서는 왜적의 전봉을 꺾었고 이현의 격전에서는 이과제중의 공을 올렸습니다. 금산의 적이 전주를 침범하지 못한 것은 모두가 다 이 사람의 힘이었습니다라고 한 사실이라든가 남원인 조경남, 보성인 안방준과 같은 직접 전쟁을 겪고 또 전선에서 싸우기도 한 이 지방 학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엄직한 사필로 유명한 우산 안방준은 1618년에 편찬을 마친 그의 호남의록에서 말하고 있다. 난이 일어나자 동복현감 황진은 즉시 열읍 관병과 더불어 각처 요지에 분거, 영남으로부터 호남으로 들어오는 왜적을 차단하였으며, 하루는 적 수천여기가 웅치에 밀어닥치는 지라 선등돌출, 저들의 전봉 수십을 사살하여 이를 물리쳤고 곧이어 이현에 대거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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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환이 빗발 같고 천지가 진동하매 제장이 퇴축하는데 유독 공은 위대기, 공시억등 약간인과 더불어 종일역전 적환을 다리에맞아 유혈이 임리한 가운데에도 오히려 분격, 난사를 계속하여 마침내 저들을 대패 복시수리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로 인하여 이 호남이 득전하기에 이르렀다고,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때 왜적의 대장도 공에게 사살되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저들이 지금토록을 명장으로서 기억하면서 탈복불기한다고도 말하고 있거니와 숙종때 왕명으로 편찬된 선조보감에서도 그와 같은 이 전투에서의 무공을 권율장군의 그것과 함께 극찬하고 있다. 황공은 훗일증의정부좌찬성과 시호무민을 받는다. 본관이 장수이며 저 유명한 황희정승의 5세손으로 1550년 명종5년에 오늘날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장신미수에 형모가 기위하고 여력이 절인하며 특히 궁마에 뛰어났던 그는 선조9년에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국경 지역에 파견되어 약 6년 동안 많은 군공을 세웠고 선조23년에는 통신상사 황윤길의 군관으로 뽑혀 일본에 다녀온다. 차적이 불구에 필도해 하리니 요장용차 하리라 하며 보검이구를 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현전후에 충청병사가 된 공은 조명을 받은 바도 아니오 자기의 영역도 아니었으되 혹은 경기도 수원.안성.죽산등지에 혹은 상주의 적암,의령의 가력등지에까지 나아가 적을 물리쳤고 특히 6월 하순에 30만 왜군의 진주성 공격이 임박하자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의병장 고종후, 호남출신 제장과 더불어 성내에 들어가 주장의 일인으로서 전후 9일간의 혈전을 진두지휘하다 적환에 쓰러진다. 용략이 제장의 으뜸이었으며 그래서 공이 살아있는 한 성중이 의중하였고 공이 쓰러지자 성도 무너졌으니 공의 죽음이 조금만 늦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