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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都巡撫營軍官 贈軍務衙門主事 鄭公 殉義碑(행도순무영군관 증군무아문주사 정공 순의비) 살았을 때보다 죽어서 더 영예로운 자는 정지환군이 아니겠눈가? 군은 하동 사람으로 문절공 휘 수충의 14세손이다. 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였다. 대대로 금산에 살면서 군의 아전을 지냈다. 갑오년 봄에 東匪(동비)가 난을 일으키고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호남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소굴이었다. 금산은 그 요충에 위치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이곳을 안위와 관계된 곳으로 간주하였다. 적은 처음에 제원역에 웅거하고 있었다. 군은 군민들을 규합하여 김제룡등으로 하여금 적들을 몰아내도록 하였으며, 주둔하고 있는 비적들을 진산에서 재차 소탕하였다. 이 때무에 적들은 이를 갈며 한번 자기들 마음대로 해보려고 하였다. 군은 더욱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방어를 하였으며, 담략이 뛰어나다고 일컬어졌던 같은 군의 사인 정두섭과 함께 방어를 도모하였다. 그리아혀 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5월이 되자 적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어 영남과 호남의 여러 군들이 모두 함락되고 오직 금산만이 고립되어 존망이 조석에 달려 있었다. 이민(吏民)과 함께 전 참판 정숙조공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고 그의 명령에 따라 포사 300명, 무사 700명, 민병 1천여 명을 모집하여 밤낮으로 엄중히 경계하였다. 당시 군비가 많이 소요되어 여러 의사들이 가재를 출연하였으나 여전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무영에 군량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영사 신정희공은 군을 군관에 임명하고 정군을 소모관에 임명하여 이들을 격려하였다. 이해 10월에 각 군의 비도 수만명이 금산으로 모였다. 군은 신속하게 병력을 나누어 여러 요충지를 방어하였다. 그리고 직접 나머지 병사들과 그의 아들 집종과 효종 및 동생 지욱등을 인솔하여 진산의 경계에 위치한 송원치에 웅거하여 5~6일 동안 힘껏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궤멸되었으며, 전사한 사람이 64명이었다. 집종이 전황을 살펴보고는 잠시 피했다가 다시 잘 도모하자고 극구 요청하였으나, 군은 "내가 죽을 곳을 얻었는데 구차하게 피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집종은 즉시 분발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엄호하여 여러 명의 적을 죽이고 전장에서 죽었다. 군은 검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사로잡혔으나 죽을 때까지 적들을 꾸짖었다. 동생 지욱과 정군도 그곳에서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특별히 군과 정군에게 군부주가를 추증하여 표창하였다. 임인년 가을에 고을 사람들이 정씨의 아버지는 충성을 위해 죽고 아들은 효도를 위하여 죽었으며 동생은 형을 위해 죽어서 한 집안에 3가지 절의가 갖추어졌으니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하면서, 세월이 흘러 그 자취가 자라지는 것을 크게 걱정하였다. 이에 비석을 마련하여 글을 새기고자 논의하고는, 내가 이 군을 순시한 적이 있어서 그 사실을 잘 알고있다고 생가하여 한마디 말을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상과 같이 그 본맑을 기록하였다. 아! 선비가 글을 읽고 학문을 익히며 입을고 충의를 이야기할 때는 사람들을 고무시키지 않은 적이 없다각, 출사하여 관직을 맡거나 혹은 큰 어려움이나 대의에 직면해서는 도리어 그 절개를 지키지 못하는 잗글이 계속 줄을 잇고 있다. 만약 이러한 무리들이 이 비를 본다면 틀림없이 이마에 땀을 흘릴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금산의 산은 얼마나 웅장하며 금산의 물은 얼마나 도도한가? 그 기운을 응축하여 그 혼백 늠름하니, 죽어서도 죽지않고 죽백(竹帛)에 빛나며, 역사속에 길이길이 한 조각 돌에 영원하리라. 1902년 8월 정2품 자헌대부 원임의정부찬정 학부대신 육군부장 훈3등 연성 이도재 지음. 종2품 가선대부 전 수사 박항래 씀. 출처 : 금산군 남산 의병순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