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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약관의 몸으로 족형 김용원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니 그 산하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22년 남만에 있는 광복군 사령부 국내 파견원인 이용담·주상옥·김택수·정창화 등과 함께 평북 삭주 군내에 들어와 대관면의 일경주재소 및 창성주재소를 습격, 일경 4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동년 8월 평북 벽동 창성 양군 경계지점에서 양승우와 함께 평안남북도 지역의 군자금 모집과 일경 및 밀정 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무장항일단체인 벽창의용단을 조직하여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벽창의용단이 조직되자마자 그는 평북 의주에서 일제기관인 보민회의 회장 오모를 사살하고, 또 평남 대동군관내의 금촌 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3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계속하여 평북지역의 금융조합을 습격하는 한편 관서 일대를 무대로 일경과 밀정을 만나는 대로 사살하고 또 그들의 집까지 불태워버리는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만주관전현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26년 5월에 다시 국내에 진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926년 5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하였으나, 1926년 9월 4일 기각당하고 평양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천우신조로 탈옥에 성공, 그 길로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12년간 헌신 노력한 끝에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