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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국민사상의 개혁과 국권수호가 급선무라고 생각한 선생은 박사를 사퇴하고 1905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준열한 무관의 언관 사관으로서 한말의 풍운과 겨루어 나갔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길 것을 직감한 선생은 1910년 국외로 망명하여 1918년 까지 연해주에서 광복회 부회장, 권업신문 주필을 역임하면서 예리한 필봉으로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 독립운동의 정도를 밝히며 동제사, 대한독립청년단 등의 조직에 참획하였고 대동단결의 선언, 대한독립선언문 등을 기초 발표하였다. 선생이 망명한 뒤 상해로 북경으로, 만주로 수만리를 편답하면서 첫째 소원은 조국의 광복이었고 다음은 일제 식민관에 의해 말살되어 가는 민족사의 근원을 찾아 단군 이래 맥맥히 이어온 민족정기를 천추에 전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때묻은 청포 하나 몸에 걸치고도 웃으면서 만주 각지를 누볐고 우리나라 엣 강역을 찾아 광개토대왕비 탐사를 비롯해 우리 역사에 관계된 사적을 탐구하는데 온 힘을 기우렸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서게 되자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 전원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정부의 방향을 제시했고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의 정신과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론이라 할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하여 아는 곧 한국, 민족이었고 비아는 이민족이었으니 선생의 한국사는 한민족과 이민족의 투쟁사로 정의하였다. 1920년에서 1927년 사이 선생은 대일무력항쟁의 계획으로 북경에서 군사통일책진회를 조직하고 제2의 보합단을 조직하였으며 위임통치제원을 통박하는 성토문과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을 기초 발표하는 한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쟁취운동에 헌신하였다. 1928년 항일독립투쟁의 일환으로 국내에 독립운동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본인 건축물을 파괴할 폭탄 제조소를 설립할 자금 마련을 위해 대만으로 가서 기강항에 상륙 직전 일경에 피체되어 대연감옥에 미결인로 수감되었다. 투옥 중 공판 심리에서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 제도의 부당함과 약소민족인 한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단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1930년 5월 10년의 실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어 수형 생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