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page


47page

아! 연재 문충선생(淵齋 文忠先生)의 휘(諱)는 병선(秉璿)이고 자(字)는 화옥(華玉)이다. 계통은 은진(恩津)에서 나왔으며 우암 송부자(尤菴 宋夫子)의 九대손이다. 헌종 병신(憲宗 丙申:一八三六)년에 회덕 석남리(懷德 石南里)의 집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은 이마가 넓고 코가 크며, 눈섭이 빼어나고 수염이 길며, 체구가 둥글고 어깨가 솟았으며, 살결이 두텁고 귀가 희며, 두 눈동자가 빛이 예민하여 어두운 때에는 여미고 단정하여 허수아비와 같으나 눈을 뜨면 정명한 풍채가 사람에게 비치었다. 성품과 도량이 온후하고 정직하며 몸 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어릴 때부터 가정에 물들어 배워야 함을 익히 알고 몹시 애쓰기를 종일토록 하여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공의 상을 당하고는 백부 수종재 선생에게 부모섬기듯 효성을 극진히 하고 가르침을 받으매 더욱 삼가하며 종형제와 더불어 날마다 반드시 갓쓰고 띠매고 모시고 앉으시었다. 겨우 20을 지나 산퇴(수종재를 말한 것)의 슬픔을 만나고 능히 연원을 이어 받았으며 과거를 단념하고 항상 성현이 아니면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을 품고 몸을 위하는 품행의 실지에 더욱 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하여 학문을 넓혀 알고 예를 지킴을 병행하고 원리와 작용이 다 갖추어지며 정성을 밝게 함으로 힘쓰고 티끌만큼이라도 외면 수식이 없었다. 사악하고 올바르고 의리의 판단을 흑백을 가리듯하며 강하를 터놓은 것처럼 하였다. 일찌기 성경 현전과 주자 송자 두 대전을 높혀 밤낮으로 의리를 탐구하고 부지런히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항상 일찍 일어나서 갓쓰고 빗질한 뒤 가묘에 배알하고 물러나 정돈하고 앉아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연구하여 만일 의심나는 뜻이 있으면 사우와 더불어 토론하고 밝히지 못하면 놓지 않았다. 그 몸을 단속함에 먹줄처럼 규칙을 따르고 밟으며 법도를 어긋나지 않게 하며 사람을 접대함에도 관후하고 진실하며 믿게하니 원근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저 평소에 말을 하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행동과 거지가 평직하고 안락하며 절대로 억누르고 찬양하는 말이 없으며 차별의 행위를 보이지 않으며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곳을 당하면 자제하고 강경히 하여 자르듯이 하니 가히 범하는 자가 있지 않았다. 을축(1865)년 황묘(만동묘) 회철 후 시를 지어 감개한 회포를 보이고 나가고 취하는 데에 뜻을 끊었다. 은명(천명)이 해마다 내려오더라도 굳게 고향을 지키고 한번도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가 갑짜기 국가에서 의복제도를 변경하는 것을 보고 연달아 상소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았다. 드디어 개연(탄식하는 모양)히 깊이 들어가 숨어서 살 계획이 있어 수간 초집을 주계 동쪽 무이봉 아래에 짓고 편액을 서벽정이라 하고 매양 춘추로 문생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계도 하고 강학도 하였다. 갑신(1884)년에 5흉(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이 범권의 변이 있고 양놈이 교회당을 세우고 야소교를 퍼트리거늘 선생이 상소하여 엄하게 배척하고 그 교를 금하도록 간청하였으나 끝내 쓰여짐을 보지 못하였다. 이 때로부터 외이가 침입하여 모욕하며 적신이 국권을 잡고 세변이 충거리로 생겨 옛 법도가 개혁되어 단발령까지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장희설을 지어 학자들에게 보였다. 학자들이 경례(경전과 경문)의 의심나는 뜻으로써 질문하면 선생이 반드시 낙민훈지(정주의 학문)와 율곡.사계.우암 모든 선생의 학설에 근거하여 답변하고 성명을 묻는 자가 있으면 대답하기를 「배움을 하매 안에다 마음을 쓰지 않으니 비록 높이 성명을 말하나 어찌 몸에 소득이 있겠는가?」라 하고 혹자가 호론과 낙론의 같고 다르다 하는 논설로써 물으면 말하기를 「과재(김정묵)는 일찌기 말하기를 외암(이속)은 단지 본체의 착하지 않음이 없음을 알고 마음의 착하고 악함이 서로 가까운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 하고 남당(한원진)은 다만 마음에 선악이 있음을 알고 본체의 착하지 않음이 없음을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써 정신은 전적으로 기질의 악한 것에 지어지는 것으로 본다고 하니 이는 근본을 알지 못한 즉 하나의 이치이다라 하였다. 여기에 근거한즉 양가 시비가 거의 확실히 보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세교(사회의 교화)가 폐하여 풀어지고 유학이 땅에 떨어진 것을 탄식하고 이에 계개론을 지어 말하기를 「주나라가 쇠하매 왕도가 진흥되지 못하고 이적(오랑캐)이 판을 치고 난신적자가 일어나는지라 공자께서 이것을 두려워하사 춘추(대의에 관한 경서)를 지어 만세의 역적을 죽이게 하였으니 주 나라의 크게 끝을 맺은 것이고 송나라가 금나라를 피하여 남으로 건너옴에 이르러 2제(의종.흠종)가 돌아가지 못하고 요금이 중주(중원)에 자리잡아 앉았다. 주자가 정통을 높히고 이적을 배척하는 의리를 밝혀 강목(사기)을 지어 위로는 대의를 접하고 아래로 후세의 길을 열었으니 이것은 송나라의 크게 끝을 맺은 것이고 우리나라는 송자께서 담당하시고 크게 하신 것이다. 신주(명나라 서울)의 변란에 황명(명나라)의 대의를 지키고 주자를 이어받아 공자의 한 도통의 의리를 밝히었으니 어찌 큼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성현이 된 바와 이적이 된 바가 실지로 밝고 밝지 못하며 존속되고 존속되지 못함에 있는 것이니 어찌 가히 소홀히 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아! 고종 정축(1877)년에 ㄷ의 주달로 묘당에 들어가 태릉참봉에 천거되어 제수되었고 경연관의 자격으로 뽑히어 성균관 좨주로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다 나가지 않았다. 을사(1905)년 국변에 이르러 쳐서 회복할 의리를 이어 12월 12일에 곧바로 정원에 나가 청대(임금 면회를 청하는 것)를의 소를 올려 입시하랍시라는 명을 받고 들어가서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재주가 열등하고 학문이 성글어 본래 족히 세상에 있고 없고가 되지 못하는데 어찌 허명을 도모하오리까? 위로 천총(임금의 총명)을 잘못 되시게 하여 전후로 돈소(권면하여 부름)하시었으나 한번도 명령을 받들지 못하와 죄송함의 지극함은 하늘에 부딛치고 땅이 깨질까 몸을 굽히더라도 진실로 용납할 바가 없습니다. 지금 국세가위급한 지경에 간절하시고 칙은하신 조서를 입사옵고 감히 편안히 평시와 같이 사차(사가)에 있지 못하고 한번 천안(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뵈옵기를 바라나이다. 어리석은 충심을 폭로하옵고 구학(계곡)에 물러가 죽는 것이 신의 평생 소원입니다.」라 하고 또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저 일본놈 두목이 비록 힘이 강하다 하나 스스로 내적(내부의 왜적)을 창귀(범에 물려죽은 귀신)가 이끌어 주는 것이 없다면 저놈들이 어찌 없다면 저놈들이 어찌 능히 한 채찍을 수고하지 않고 앉아서 3천리 강토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병을 치료하매 먼저 속의 병을 다스린 연후에 다음 4지에 미칠 것이고, 도적을 막더라도 먼저 울타리를 튼튼히 한 연후에 가히 스스로 지킬 수 있을 것이어늘 지금 모든 도적이 궐내에 있으며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저번 날에 강제 조약의 변이 있는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고금 천하에 어찌 반폭의 종이로써 앉아서 국가를 잃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급히 조서를 내리시어 모든 역적을 사법 신하에게 내리시어 죄를 드러내어 다스려 죽여 없새어 모든 백성의 분통을 덜게하고 만국이 쳐다보게함을 솟구쳐 움직이게 한 연후에 국권을 가히 회복할 것이고 정치를 가히 개혁하여 종사가 편안하며 인민을 가히 살게 할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폐하께서는 넓리 건단(군주가 스스로 정사를 재결)을 발휘하시사 곧 처분을 내리시고 급히 국법을 바르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러하다」라고 거듭하시었다. 또 차자를 드려 말하기를 「아! 일본 도적의 우환이 됨이 옛부터 어찌 한계가 있으리까마는 임진(1592)년의 화와 을미(1895)년의 변은 온 나라 신민이 불공대천의 원수이어늘 금일에 와서는 백천만의 인민이 다 저 도적놈들의 어육(짓밟고 으깨어 절단을 내는 것)이 되게 되었으니 곧 청성(금이 송나라 2제를 가둔 곳) 오국(요의 오국부에 절도사를 주둔시킨 곳)의 화와 종사가 폐허가 될 참상이 면전에 반드시 올 형세입니다. 감히 우견을 죄와 같이 고하여 올립니다. 첫째는 모든 도적을 베어 왕법을 바르게 하시고, 둘째는 어질고 능한 사람을 뽑아 각료의 책무에 충당하시고, 셋째는 동맹의 의리에 의거하여 각 공관을 공변되게 처리하시고, 넷째는 기강을 세워 명분을 정하시고, 다섯째는 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순찰하시고, 여섯째는 재정을 정리하여 국력을 펴게 하시고, 일곱째는 정학을 숭상하여 현사를 양성하며, 여덟째는 사설을 배척하여 적당을 막게 하시고, 아홉째는 법률을 밝게 하여 송사를 정리하고, 열째는 군력을 배양하여 불의를 방비하는 것입니다. 무릇 이 20조는 곧 도를 호위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시국을 구제하는 급무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성상께서는 놓아주고 취하고 나가고 머무름을 헤아리옵소서.」라고 하였다. 상께서 비서승으로 하여금 받아 들이시어 친히 보시고 말씀하시기를「짐이 마땅히 자리 오른쪽에 두고 항상 눈 가는대로 하나하나 실시하리라」하셨다. 선생이 말하기를 「모든 도적을 베는 일은 다만 폐하의 한 조서에 있습니다. 청을 윤허하시지 않으시면 신은 굳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하였다. 께서 말씀하시기를「마땅히 시행함을 도모할 터이니 잠깐 물러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나라가 망하고 도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상격(정해진 격식)을 불구하고 장차 죽음을 무릅쓰고 힘써 간하여 이미 실시하랍시는 처분을 입으면 잠깐 물러가 기다리는 것이 곧 임금을 공경하는 도리이다」하고 이내 사차로 물러가 성후(임금의 기후)의 평복(병이 나아서 회복됨) 하시기를 기다렸다. 또 물러나가라는 뜻으로 여러번 조서를 내리시었으나 끝내 봉행하지 않고 바야흐로 죽음을 무릅쓰고 천폐(궐문)에 물러나와 엎드려 기다리려 하여 평장문으로 나오기 경무사신 윤철규가 와서 말하기를 「스스로 수옥헌까지 가기가 좀 멀으니 노인의 근력이 걸어가기가 어렵다」하고 교자에 타기를 청하였다. 교자를 멈추니 곧 남문밖이었다. 비로소 속았음을 깨닫고 크게 질책을 가하니 철규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사사로 자의로 한 것이 아니고 곧 상감께서 본댁으로 모시어 돌려보내라는 칙령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반드시 네가 거짓 성지(임금의 뜻)로 모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 순사와 순검이 와서 칙령이라 일컫고 여관을 정하여 숙소를 차리고 먼저 선생이 찬 칼을 빼았고 또 옷소매에 소장한 약물을 뒤지며 이르기를「밤새도록 보호한다.」하고 곁에서 떠나지 않고 외인과 자질들과 문생들을 금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일본놈 두목이 강제로 부축하여 차에 타게하고 자질과 문생들을 불러들여 같이 타게하여 대전에 가서 하차하니 석남 옛집까지 겨우 1리 남짓하였다. 선생이 문생을 돌아보고 말하기를「한 걸음 가면 한 걸음의 욕이요 두 걸음 가면 두 걸음의 욕이다」하고 이내 옛집으로 들어갔다. 또 문인에게 이르기를「내가 임금에게 고하지 못하고 왔으니 부득불 상소를 해야할 터인데 정신을 가히 수습하기 어렵구나. 내 장차 조용한 곳에서 상소문을 초하리니 제군들은 다 물러가 쉴지어다」하시고 석후에 상소문을 상자위에 두시고 도포를 입고 세수하고 북향4배하였다. 그 소에 이르기를, 「신이 적을 칠 계획으로 약속한 일을 폐하고 소와 차자로 공경히 처분을 기다린지 이미 날이 오래되고 여러번 청대하려 하였으나 성후미령(임금의 병환) 하시므로 궐문에 대령하였더니 경무사신 윤철규가 와서 신을 달래며 신을 붙들며 교자에 싣고 잠깐 사이에 이미 성외에 이르렀는데 순검과 왜놈 순사가 칙령으로 보호한다고 일컫고 신의 몸을 수색하며 온갖 곤욕을 당하고 위협하여 화차(기차)에 실리어 곧바로 공주의 대전에 도착하여 신을 쫓아 시골로 돌려보내니 그 때에는 죽으려 하여도 되지 않고 신이 모욕을 받은 것은 진실로 족히 가엾을 것은 없으나 조정에 모욕을 끼쳐 어찌하며, 사람에 모욕을 끼쳐 어찌 하옵니까? 아! 모든 역적을 죽이지 못하고, 강제로 맺은 조약을 돌려보내지 못하였으니 5백년 종사가 금일에 와서 망하고, 3천리 강토가 금일에 와서 없어지고, 수백만 생명이 금일에 와서 멸하고, 5천년 도맥이 금일에 와서 끊어지게 되었으니 신이 금일에 살아남은들 또한 무엇하겠습니까? 장차 돌아가서 우리 열성조(역대의 왕)와 선성현을 지하에서 모시고 춘추대의(정통의 대의)를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엎드려 비옵건대 성상께서 살피시고 가엾이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자제들에게 글로 경계하시기를「몸을 수양하여 천명을 기다리고, 선세의 유훈을 지키고, 가풍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하시었다. 또 문인에게 결별하기를「선도(바른 인도)를 죽을 때까지 지킬 것이니 오직 제군들은 힘 쓸지어다」라 하시고 자질들을 돌아보시고 말하기를「행랑속에 소장한 약물을 내가 이미 복용하였으니 사후라도 후하게 염을 하지 말고,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지며 묘도에 다만 조그마한 돌을 세워 표하라」하시고 인하여 자리를 바르게 깔라고 하시고 벼개에 의지하여 잠들은 것처럼 하시더니 잠시 후 운명하시었다. 곧 30일 사시였으며, 누린 수는 70이었다. 아! 슬프다. 하늘이여! 신명이여! 이 날에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먹는 샘물이 끓어 솟아오르고 밤에 또 천동을 하였다 사람들이 탄식하며 이상하게 여겨 말하기를「훌륭하신 분이 세상을 뜨시지 어찌 재앙이 없겠느냐?」라고 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께서 진도(임금이 신하의 죽음을 애석함)하시고 조서를 내리시어 특별히 대광 의정을 추증하셨다. 장례의 절차는 하나 같이 유훈에 따랐다. 병오(1906)년 정월 6일에 원계로 반구하는데 길에서 맞이하여 곡하고 서로 조상하는 자가 가뜩 줄지어 서로 이어지고 문인들이 요질을 두른 자가 거의 수백인이며 성균관 학생과 도의 유생들이 곡위를 배설하고 제례를 올리며 제문을 가지고 와서 전을 들이기도 하였다.몸종 공임이 슬퍼하고 야위어 식음을 전폐하고 말하기를「나는 지하에서 상전을 따르리라」하고 곧 목을 찔러 죽었다. 또한 어찌 선생의 은혜의 교화가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문인들이 유소를 받들어 드렸다. 2월 2일에 금산 성곡 뒤에 장례지냈다가 임피 남성산으로 이장하였다. 웍능에서 와서 모인 자가 수천 인이었다. 3월에 치제와 선시(시호를 내리는 일)의 명을 공경히 받았다. 시호는 문충인 도덕과 학문이 넓음을 문이라고 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집을 잊음을 충이라 하였다. 국가에서 증이(증직과 증시)의 은전과 높이 포상하란 명령은 이제 유감이 없고 후학의 안방(현인의 표준을 의미)의 슬픔을 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아! 정미(1967)년에 8도 선비들이 선생 사시던 고을 석남 동쪽 모리에 사우를 세우고 춘추 2월달과 8월달에 제향을 경건하게 받든다. 심석재선생을 종향하여 이미 30년이 가깝다. 금년 봄에 증손 승호가 조카 영문 및 사림들과 더불어 모의하여 묘정에 비석을 세우는데 나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라고 명하므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아래와 같이 서술하노라. 드디어 기리어 가로되, 우리 연재 선생의 학통은 율곡과 우암을 이어 받고 의리는 정통의 대의를 잡았도다. 굳세게 결단하는 정기이며, 굉장하고 넓은 대업이로다. 한국 만년에 유도의 큰 끝을 맺었으니 뒤에 오는 학자들이 마땅히 존모하고 숭상하기를 그치지 않을 지로다. 심석재의 휘는 병순이고 자는 동옥이니 연옹의 아우로서 학문으로 천거되어 도사를 하였다. 임자(1912)년에 위관(정통이 아닌 조정의 벼슬)을 받지 않고 의리에 순절하였다. 세상에서 송나라의 양정 선생(정명도, 정이천의 형제)에게 비기어 일컬었다. 신미(1991)년 8월 일 종후학 송정현은 삼가 찬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