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殉國烈士 白于 李章寧將軍 功績碑文(순국열사 백우 이장녕장군 공적비문) 지절(志節)의 고강(高强)함이여 기품(氣稟)의 중후(重厚)함이여 한 평생(平生)을 오로지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에 기여(寄與)하시었으니 천추(千秋)에 귀감(龜鑑)이도다. 장군(將軍)의 휘(諱)는 장녕(章寧)이오 호(號)는 백우(白于)이며 관(貫)은 연안(延安)이시니 시조(始祖)는 당중랑장 휘 무(唐中郞將諱茂)이요, 중시조(中始祖) 태자첨사공 휘 습홍(太子詹事公諱襲洪)의 이십오세손(二十五世孫)이며 연원부원군 광정공(延原府院君光庭公)의 십이세손(十二世孫)이 되시다. 서기(西紀) 일팔팔일년(一八八一年) 신사(辛巳) 오월 이십일(五月二十日) 천원군 목천면 남화리(天原郡木川面南化里)에서 고 휘 병칠공(考諱炳七公)과 비 안동권씨( 安東權氏)의 사이에서 제 이자(第二子)로 출생(出生)하시었다. 유시(幼時) 삼숙(三叔) 병삼공(炳三公)의 후(后)로 출계(出繼)하시었는데 한학(漢學)을 이수(履修)하신지 미구(未久)에 상경(上京)하여 대한제국무관학교(大韓帝國武官學校)로 진학(進學)터니 제 삼기 수료 후(第三期修了後) 참위(參尉)를 거쳐 약관(弱冠) 이십이세(二十二歲)로 부위(副尉)가 되시었다. 1905년 을사위약(乙巳僞約)이 늑결(勒決)되고 이년 후(二年後)에 다시 정미 군대해산령(丁未軍隊解散令)이 내리자 장군(將軍)은 국환(國患)이 벌써 심부(深部)에 다다랐음을 직감(直感)하고 이제는 국내(國內)에서 항일거병(抗日擧兵)하느니 차라리 만주광야(滿洲曠野)에 흩어져 사는 다수(多數)의 동포(同胞)와 더불어 권토중래(捲土重來)하리라는 결심(決心)으로 천원(天原)의 가족(家族)을 인솔(引率) 망명(亡命)하시었다. 일구○팔년(一九○八年) 이월(二月)의 혹한 중(酷寒中)에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에 이르니 지세(地勢)가 마치 군략(軍略)과 집단영농(集團營農)에 최상지(最上地)라. 즉시(卽時)로 국내(國內)의 지사(志士)들에 연락(連絡)한 바 때에 신민회 계획사업(新民會計劃事業)이 이와 같은 독립운동기지(獨立運動基地)를 해외(海外)에 건설(建設)하는 일이었던지라 몇 차례의 면밀답사(綿密踏査) 끝에 이철영 육형제(李喆榮六兄弟)를 비롯하여 각도 대표 일백여호(各道代表壹百餘戶)가 선왕(先往)케 되었다. 이래(爾來) 교민(僑民)들은 늘어 일편개간 일편양병(一便開墾一便養兵)키로 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케되니 장군(將軍)은 초대.이대(初代二代)를 훈련감(訓練監)에 계시다가 삼대(三代)부터는 교장(校長)을 맡아보시었다. 때마침 중국(中國)에서는 손문 주도 혁명군(孫文主導革命軍)이 일어났으니 신흥사관(新興士官)들을 출동(出動)시켜 민주 혁명측(民主革命側)을 도왔던 바, 그 노고(勞苦)로 이후(爾後)부터는 중국정부(中國政府)로부터 공인(公認)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展開)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장군(將軍)은 부민회조직(扶民會組織)에 가담(加擔)하였다가 한족회(韓族會)로 발전(發展)시킴과 동시(同時)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치 활동(設置活動)하셨으니 항일전략(抗日戰略)은 태반(殆半)이 장군(將軍)의 지모(智謀)에서 발휘(發輝)되었음이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도 특청(特請)이 있어 부임(赴任)하니 역시(亦是) 그 총참모(總參謀)이시었다. 당시(當時) 총재(總裁)는 서일 사령관 김좌진(徐一司令官金佐鎭)이 취임(就任)하였는데 이 편제(編制)를 백두산하(白頭山下)로 이관(移管)하며 세기(世紀)에 유례(類例)없는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거둔 것이다. 기미 만세운동 이래(己未萬歲運動以來) 망명(亡命)하는 장정(壯丁)을 규합(糾合)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재편(再編)하니 병력(兵力)이 무려 삼천오백(三千五百)을 넘겼는지라 그 사령관(司令官)이 되시었다. 이제는 군정세(軍政勢)가 일치(一致)할 시기(時期)라 전만통일 준비위원장(全滿統一準備委員長)으로써 정의부(正義府)와 신민부(新民府)를 탄생(誕生)케 하시었다. 그 동안 각 기관(各機關)의 고문(顧問)으로 잠시(暫時) 휴양(休養)할 여가(餘暇)도 없었는데 일구삼이년(一九三二年)에는 만주괴뢰정부(滿洲傀儡政府)가 수립(樹立)되며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장애(障碍)가 되어짐으로 차라리 중국 본토(中國本土)로 이향(移向)할 계획(計劃)이었는데 일구삼삼년(一九三三年) 일월 이십사일(一月二十四日) 중국인 친일간흉(中國人親日奸凶)의 총해(銃害)에 피격(被擊)되어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은 채 이역만리 타국(異域萬里他國)땅에서 서거(逝去)하시었으니 배 풍산홍씨(配豊山洪氏)와의 사이에서 낳으신 의복(義復)과 의명(義明)이 그 뒤를 이어가게 되었다. 정부(政府)에서는 장군(將軍)이 남기신 공로(功勞)를 기리며 일구육삼년(一九六三年) 삼월 일일(三月一日)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을 훈서(勳敍)하였으니 이에 널리 세상(世上)에 알려 위국충정(爲國衷情)의 표치(標幟)를 삼고저 온 국민(國民)의 정성(精誠)을 모아 삼가 본 비(本碑)를 세워드립니다. 서기 일구팔삼년 사월 일(西紀一九八三年四月日) 대덕군수 조국환 근수(大德郡守曺國煥謹竪) 만리귀혼미고국 관민난인곡차지 (萬里歸魂迷故國 官民難忍哭此地) 위국문무불고신 유연대의상록치 (爲國文武不顧身 惟然大義常綠峙) 화순후인 최동원 헌(和順後人崔東源獻) - 출처 : 연안이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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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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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만 할 수 있는 것 밖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