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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온 한인 포로감시원들은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일본군은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 연장하였다. 한인군속들은 고려 독립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의거를 결심하였다. 1945년 1월 4일 한인군속과 포로들을 말레이 방면으로 전속명령이 하달되자 독립당은 1월 5일 이 수송선을 탈취하기로 계획하고 김현재가 총지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1월 4일 저녁에 당원 손양섭과 그가 포섭한 민영학과 노병한이 암바라에서 거사를 하였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알바라와 의거는 인도 자바 암바라와 읍에 자리한 자바포로수용소 제3분소 제2분견소에서 일어났다. 1945년 1월 4일 분소로부터 이동명령이 내려와 암바라와 제2분견소에서 6명의 한인군속들이 전출하게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전출자들과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손양섭 등 3명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 분견소의 무기고로 들어가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민영학과 노병한은 탄환 3,000발을 가지고 소장관사로 향했다. 무기를 탈취한 3명은 억류소장 스스키 대위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리고 형무소로 가서 형무소장을 사살하고 잠복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위기를 모면한 억류소장 스스키 대위는 긴급히 세마랑 분소에 연락하여 응원대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이로서 본소는 물론 자바 사령부까지 보고되어 암바라와 주변은 삽시간에 이중삼중의 삼엄한 비상경계가 펼쳐졌다. 의거가 일어난 첫날밤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한 후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대퇴부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수수밭으로 들어가 소총의 방아쇠의 구두끈을 매고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자결산화하고, 한편 위생재료 창고로 피신한 손양섭과 노병한은 1월 6일까지 숨어 있다가 이곳을 도저히 탈출할 수는 없다고 판단 차라리 저들의 손에 잡혀죽느니 깨끗이 죽는 것이 낫다하고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작렬이 순국하였다. 그들은 3일간의 싸움에서 군인, 군속 일본인 등 1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