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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 손양섭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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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섭은 일제말기 연합군 포로의 감시요원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일제는 1942년 5월부터 육군성의 계획에 의해 조선군(朝鮮軍)에 한국인 포로감시원 모집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인 청년들이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사실상 강제 징집되었다. 당시 포로감시원 지원자는 극히 적었기 때문에 각도에 할당되어 실시되었으며, 각 부, 읍면장과 아울러 경찰서·주재소에서 응모를 강권하였다. 손양섭을 비롯한 3천 여명의 청년들은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 통칭 野口부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 동남아시아지역으로 출발하였다. 군속 등 1,400명은 9월 14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구에 도착하였고, 손양섭은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손양섭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와서 2년이 된 1944년 6월 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손양섭을 비롯한 한인들을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연합군에 의해 패할 것을 전망한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한인 군속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李活, 본명 李億觀)을 중심으로 중부자바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라는 고원지대에서 1945년 12월 24일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당시 고려독립청년당 암바라와(ambarawa)지구에서는 손양섭(孫亮燮)이 책임자가 되어 노병한(盧秉漢)·민영학(閔泳學)·조규홍(曺奎洪)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월 3일 암바라와분견소에서 지하공작하던 손양섭을 포함하여 한인 6명이 말레이포로수용소로 갑자기 전속명령을 받게 되었다. 손양섭은 갑작스런 전출명령에 대해 조직의 정보가 일본군들에게 누설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노병한·민영학과 밤을 새워 사후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별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1월 4일 전출명령에 따라 손양섭 등 전출자들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손양섭과 민영학·노병학 3인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로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민영학과 노병한은 탄환 3천발을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하고 잠복하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암바라와 억류소장은 긴급히 세마랑분소에 연락하여 병력을 요청하여 그날 밤 수십 명이 도착하였다. 암바라와의거에서 형무소장 사살에 성공한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수수밭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일본군에 쫓겨서 위생 재료창고 안으로 들어온 손양섭과 노병한은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였다. 암바라와의거 이후 고려독립청년당 총령 이활은 제2차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중간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관련자 10명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일본군사령부에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