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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선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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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선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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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44세 때인 1904년 4월에 이르러 노일전쟁이 일어남을 계기로 강력한 정당을 조직하여 국정을 개혁하고 몽개한 국민정신을 계몽할 목적으로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동학은 지하 조직으로 있었던 만큼 개회 벽두 경향각지에 지부조직을 결성하여 16만 회원이 하루아침에 단발흑의의 갑진개혁운동으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선생은 1905년 12월 1일을 기해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선생은 1906년 1월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이용구 이하 매국운동에 가담한 62명을 출교하여 교회의 내부를 정와 일신하였다. 이후에 선생은 오로지 수심연성과 포덕제세의 종교사업과 보성학교와 동덕여고를 위시하여 경향각지에 수백 개소에 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의 신교육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보성사를 설립하여 출판 및 교육문화사업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48세 때인 1908년 장래 구국운동에 대한 준비로 각 지방의 유수한 지도자를 선발하여 조국광복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던 선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각계각층의 애국세력을 총망라한 기독교, 불교, 천도교가 합작으로 추진하여 3.1운동을 준비했다. 선생은 폭력적 민중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을 것이며 또 서구 문명국의 동조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비폭력운동을 전개했다. 59세 때인 1919년 기미년 3월 1일을 기하여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 선언문 24,000매를 인쇄하여,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역사민족의 의기를 세계만방에 널리 떨쳤다. 그해 4월 대한민간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던 중에 1922년 5월 19일 병세가 악화되어 큰 뜻을 이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