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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이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무렵 광무황제가 독살 당하자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金泰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 구(金九)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부터 다음해(1920) 6월까지 황포(黃 )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專修)하였다고 한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그는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朴容萬) 나창헌(羅昌憲)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 강(李堈)공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강공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 구(金九)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 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동년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한 임시정부의 후원과 지도를 목적으로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朴贊翊)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 진 신익희 이진산(李震山)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신병이 발생하여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 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동년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