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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강산 김용원 선생 사적안내 강산 김용원 선생은 1892년 2월 대전의 원정동에서 송애 김경여의 8손으로 태어났다. 1916년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총독과 일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활동했었다. 3.1운동 직후 대동단에 가입하여 전협 등과 의친왕 이강공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였으니 의친왕이 중국의 단동역에서 왜경에 의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충남 일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1920년 3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나창현과 함께 철혈단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원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5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고 김구 선생의 후임으로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외교후원회의 간사로서 신익희 등과 태평양회의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여 대한의 독립을 만국에 천명하였다. 1922년 의정원 상임위원을 사직하고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늑막염에 걸려 1924년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은 요양을 한 후 수원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재계하였으며, 이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신병으로 인하여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국내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등 활동하다가 1927년 다시 체포되어 2년 6월형을 선고받았으나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이 재발되어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28년 형집행 정지를 취소하러 온 왜경을 구타하여 기절시키고 은신하면서 중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왜경들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12월에 다시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잔여형 량을 채우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위중하게 됨에 일제는 1934년 2월 선생을 병보석으로 석방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형독으로 그해 6월 회국제민(回國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선생의 위훈을 기렸다. - 고증 김상기 교수 2008. 10. 4 세움 * 회국제민 : 나라를 되찾고 어려움에서 백성을 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