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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장대동은 유성을 비롯한 대전일대의 사민士民들이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에서 가장 먼저 병을 일으킨 역사적 현장이다. 1895년 9월 18일 진잠 현감을 지낸 문석봉文錫鳳이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국수보복론國讐報復論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써 보답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정신에 입각하여 민영환과 손근수 신응조 등 중신들의 찬동을 얻어 옥천의 오형덕, 공주의 김문주, 회덕의 송도순 등 지방 사족들과 함께 유성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유성장터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회덕현 무기고를 급습하여 무장하고 진잠과 공암을 거쳐 공주의 와야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의병들은 왕촌 일대로 피신하였다가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의병장 문석봉이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함으로써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성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단발령 공포 후 전국적으로 의병봉기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성의거는 일제에 맞서 이 지역의 선비와 민중들이 함께 분기했던 고귀한 투쟁의 역사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은 유성의병의 사적을 후세에 알려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며 백여 년 전 유성의병의 기개가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데에 그 취지가 있다. 2004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