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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28일 광무황제의 국장을 참배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이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보고, 고향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하고 4월 6일 귀향하였다. 귀향 즉시 먼저 이웃에 사는 추경춘을 만나서, 그 취지를 설명하여 같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다음 4월 7일에는 두 사람이 동리사람 박성교·추득천·윤자벽·윤상원·윤자훈·윤상억·김재주 등과 함께 읍내리 장날인 4월 13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4월 8일에는 김병옥의 집에서 이장희·이광희·정원필 등과 만나 다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장터에서 시위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 약 150매를 목판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4월 13일 오전 9시경 읍내리 시장으로 가는 길목인 갈정리 고개에 나아가, 장터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미리 만들어 둔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자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많은 시위군중이 이어 호응하여 장터를 행진하는 등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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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國志士 追慕碑(애국지사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