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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탑 건립비 1919년 3월 1일 정오 2천만 겨레의 함성은 신분과 계층 지역과 종교를 초월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을 뒤흔들었고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기개를 떨쳤다. 그때 우리 고장 공주는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일제의 감시가 삼엄하여 만세운동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이 지역을 대표하여 서덕순 유준석 윤봉윤 김상진 노명우선생 등이 3월 1일 서울 파고다(탑골) 공원 독립선언문 선포식에 참가하였고 공주에서는 한 달 뒤인 4월 1일 공주 장날을 기하여 일제히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김관회 김수철 이규상 선생이 주도하고 영명학교장 월리엄 선교사와 현석칠 안창호 목사의 후원 아래 영명학교와 농업학교 남여학생 일본 동경과 서울 유학생 시민 수백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특히 영명학교 학생으로 양재순 노명우 윤봉균 강윤과 유관순 열사의 친오빠 유관옥 4촌오빠 유준석도 학생 신분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이에 주동자인 영명학교 선생과 학생 교회목사와 일반인 수백명이 태형과 옥고를 당하였으며 일부 인사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점차 확산되어 정안 석송리 이병림 의사가 흉탄에 쓰러지고 이기한 등 25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유구 탄천 계룡 장기 의당 우성 등 모든 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개되었다. 이러한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날 우리 세대의 화합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자라나는 후손들로 하여금 강물처럼 흐르는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하여 기념탑을 세우고 이를 영원히 기린다. 2004년 3월 1일 기미년3.1 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