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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충의로 이어지는 진주유씨 일문은 호서의 우뚝한 충절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여기 옥녀봉 서남향 언덕에 선조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오직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평생을 다 하신 애국지사 유석우 선생께서 고이 잠들어 계시다. 선생은 서기 1874년 갑술 9월 7일에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아버지 기승공과 어머니 안동김씨 사이에 독자로 태어나 명가의 기품을 이어받으며 성장하였으니 휘는 석우 자는 공무 본관은 진주로 시조는 대승공 차달이고 중시조는 그 9세손 진산군 인비이다. 선대를 살펴볼 때 학덕 높은 대학자 이도의 귀감인 청백리 경세의 정치가 국란극복에 앞장 선 무인 등 문무에 걸쳐 역사상 유공한 인물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춘추관 대학사 정평공 구와 보문각 직제학 겸(謙)은 대를 이어 청백리 반열에 올랐고 관찰사 공조판서를 지낸 정민공 진동은 정사에 크게 경륜을 폈을 뿐 아니라 시서화에도 높은 의지를 이룬 대가이다. 또한 임진전란 중 이충무공과 더불어 전공에 빛나는 증 영의정 삼군수군통제사 충경공 형은 진충보국의 명장으로 공주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파조 세자 익위사 익위금사공 충걸은 철리에 밝은 석학이고 고조인 증 호조판서 재원과 증조인 수군절도사 상묵 조인 통덕랑 준검도 한결같이 고결한 인품과 덕망으로 추앙받았다. 이같이 빛나는 선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선생은 천성이 호방강직하고 위엄과 덕을 아울러 갖추었으니 일찌기 학문과 무예에 힘써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으로 성충을 다하던 중 한일합방을 당하여 나라 잃은 통한에 잠긴 채 향리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러기 10개 성상 망국의 한 맺힌 선생은 기미 3.1운동이 일어나자 정희준 이우상 이홍규 제공과 더불어 결연히 일어나 황병주 일진과 합세 유구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그 여세를 몰아 유구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간악한 왜경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선생은 이 일로 곧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공주감옥에 갇혀 오랜 옥고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옥리들도 그 의연한 인격에 감탄했다 한다. 선생은 출옥 후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지자 부득이 서산으로 이거하였으며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하면서 일제 말기의 변절 심한 세태 속에서도 고고히 그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한의원을 차려 심오한 인술로 빈한한 병자를 무료로 돌봐주고 서당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