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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러한 고난과 시련 끝에 귀향한 선생은 건국사업의 기초가 건전한 이념과 투철한 국가관으로 무장된 청년의 육성에 있음을 통감하시고 모든 명리를 떠나 향리인 서산에서 김제능 류순식 등 동지들과 뜻을 모아 청년운동에 힘쓰셨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함이여. 선생은 독립운동에 따른 모진 고초가 건강을 크게 해쳐 애석하게도 1950년 1월 19일 41세를 일기로 타계하시니 평소 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애국애족 정신을 우러러 따르던 동지들과 군민들의 뜻에 의하여 군민장으로 엄수되었다. 선생은 부인 광주이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니 독자인 근환 또한 아버님의 좌우명인 견리사의 견의사명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육군소장으로 사단장 정보사령관 등 국방의 중직을 두루 역임하고 두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후 사회 각 분야에서 중진으로 큰 업적을 남겨 놓았으며 자손들이 모두 번창하고 있다. 여기에는 독립투사의 아내로서 한 어머니로서의 눈물겨운 정성과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