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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 운동에 몸 바치신 독립투사 류성호 선생께서 여기 고이 잠들어 계시다. 선생은 서기 1909년 3월 9일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구한말 선전고나을 지내신 아버지 석우공과 어머니 능성구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니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대승공 차달이시고 중시조는 그 9세손으로 본관을 진주로 한 진산군 인비이시다. 선생의 가계는 문무에 걸쳐 나라에 공이 큰 인물을 많이 배출한 명문으로 선대인 춘추관대학사 정평공 구와 아드님인 보문관 직제학 겸(謙)은 2대에 걸쳐 청백리로 치정의 귀감이 되고 증영의정 삼도수군 통제사 충경공 형은 임진왜란 중 국란을 극복한 명장으로 그 위훈이 청사에 빛나며 아버님은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 선 애국지사로 덕망 높은 선각자이시다. 이러한 충절이 면면이 이어져 온 자랑스러운 가풍속에서 성장한 선생은 천성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언행일치의 행동인이시었다. 일찌기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선생은 당시 일제 식민지 정책의 모진 강압과 착취에 울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독립투쟁에 몸바치기로 결심하시었다. 선생은 급기야 1936년 9월 결연히 중국 대륙에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상해 남경 방부지역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불행히도 1941년 7월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무려 보름 동안 밤낮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기밀사항을 밝히지 않았다.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충남 서산읍 석남리에 강제 압송하여 거주 및 활동을 10리 이내로 제한하고 선생의 일거일동 엄중감시하였다. 1941년 11월 일경의 체포 수감 기도를 류붕렬 서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로부터 알게 된 선생은 그들의 허점을 틈타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으로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을 엄중감시하였다. 선생은 감격의 8.15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가슴 벅찬 귀국길을 뒤로 미룬 채 고려인민회를 조직하여 동포들의 안전과 권익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시다가 그해 12월에 그 곳 교민 전체의 염원이 담긴 청원서를 민주의원회장 이승만 박사에게 전하기 위하여 환국 도중 평양측에 발각되어 혹한 속에 2주간이나 수감 중 중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는 고초를 겪으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