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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애리시(史愛理施) Alice Hammond Sharp 선교사 가족 사애리시(史愛理施) Alice Hammond Sharp 선교사는 29세이던 1900년에 홀로 한국에 왔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에서 나고 자란 선교사는 소녀 시절 예수님의 발자취와 뜻을 따르기를 꿈꾸었다. 뉴욕 브루클린의 선교훈련원에서 교육을 받고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이화학당 등에서 스크랜턴 선교사를 도와 사역하였으며, 선교훈련원 동창으로 3년 뒤에 온 샤프 Sharp 선교사(1872~1906)와 1903년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남편 샤프 선교사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사역하였으며, 서울 황성기독청년회 YMCA에서 초대 이사로 기독교 청년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이들 부부는 1903년 신설되는 감리교 공주선교기지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충청도 지역에 순회선교를 하면서 남학생을 가르치는 명설학당과 여학생을 가르치는 명선학당을 열었다. 이 학당들은 오늘의 영명.중고등학교로 이어져 충청도 최초의 근대학교가 되었다. 농촌순회선교를 마치고 귀가하던 샤프 선교사는 빈들에서 만난 진눈깨비를 피해 들어갔던 상여 집에서 옮긴 전염병으로 1906년 3월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다. 충격을 받은 아내 사애리시 선교사는 모국 미국에서의 안식 후에 1908년 다시 이곳 영명동산에 있는 남편 곁으로 와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9년에 개설한 강경만동여학교와 논산영화여학교를 비롯하여 충청지역에 20개 여학교를 개설하는 등 그는 이 땅의 여성을 개화하기 위해 헌신한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이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이다. 열세 살 유관순을 양녀로 삼아 교육하였으며, 또한 행방불명된 독립군의 딸(오애리시)을 입양하여 키우는 등 민족독립운동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한국 최초 여성 경찰서장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여성목사 전밀라, 철도간호학교를 세웠던 박한나 권사 등 수 많은 여성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흰색 라일락꽃을 좋아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남편의 무덤을 향해 매일 이야기를 나누며 일생을 보냈으며, 그녀의 오르간 위에는 항상 젊은 시절 남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오르간 반주를 해가며 찬송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제자들과 함께 부르곤 하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39년간 한국의 교육과 선교에 헌신하였다. 1939년 은퇴 후에 미국으로 돌아가 1971년 닉슨 대통령과 후에 대통령이 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축하 편지를 받으며 100세 파티를 가진 후 1972년 100세에 파사데나의 선교사요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았다. 유품은 낡은 성경책, 옷가지 몇 벌과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 뿐이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미국 파사데나 부근 알타데나의 마운틴뷰 묘원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복음하던 분들과 함께 영면하고 있다. 2019년 3월 1일 3.1운동 100주년에 이땅에 오신 의로운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한국선교유적연구회.공주기독교역사위원회가 적고 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