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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일대기 유관순은 1902년 천안 병천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 개화의 물결과 함께 열강의 침탈이 거세지던 시기였다. 유관순 관문은 원래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었지만, 아버지 유중권은 신문물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관순의 가정은 넉넉하지 못하여 학교에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공주에서 영명여학교를 세워 신교육 활동을 펼치던 미국 감리회 사애리사(Mrs Alice H. Sharp)선교사가 부흥회 인도를 위해 천안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를 방문하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야무지고 당찬 모습의 소녀 유관순을 만났다. 그리고 수양딸로 삼아 공주로 데려왔다. 유관순은 1914년 4월 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유관순은 영명여학교의 사애리시 교장 사택에서 숙식하면서 특유의 활달하고 명랑한 모습으로 학업에 전진하였다. 영명여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은 어린 유관순의 마음속에 민족의식과 애국심의 싹이 트는 계기가 되었다. 유관순은 1916년 3월 영명여학교에서 2학년 과정을 마치고 경성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이화학당 재학중에도 교비생으로서 학비를 면제받게 해 주었고 생활비도 지원해주었다. 유관순은 공휴일이나 방학 때에는 천안의 집보다 공줴 내려와서 사래이시 선교사를 도와주면서 전도활동도 함께 다녔다. 유관순은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학교가 휴학하자 귀향하였다. 고향에 머물며 있던 유관순은 4월 1일 아우내 장날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공주경찰수에 압송된 유관순은 공주읍내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된 오빠(유우석)를 만났다.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엄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남매는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ㄷ. 하지만 유관순은 재판정에서 "왜 제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느냐!" 며 굴하지 않았고, 감옥안에서도 대만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은 가혹했다. 유관순은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순간에도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라고 말했다. 결국 유관순은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