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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군과 천화군으로 편성하여 선생은 그 군사장이 되시니 가위 위수위화 대거항일을 전개하시다. 4250년에는 양한묵 사제 익주등과 함께 각 군사단체를 규함 독립군으로 재편성하여 3.1운동을 선도하시다. 4252년 4월 선생은 전 협 최익환 제 익주 등 제공과 대동단을 조직하여 자금 확보와 단원 모집을 담당하고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한일합방의 부당서을 통론하였으며 한일합방으로 인한 일본의 야욕의 팽배는 필시 아세아의 침략과 동양평화의 교란을 재래할것을 미국과 파리강화회의에 문서로서 경고주장하시다. 또한 대동단의 강령을 적극지지하여 전국에 조직망을 구축하는 한편 안국동 광장에서 제2의 독립만세를 결행할 자금조달과 유인물 살포를 위한 만반준비와 거사 인원 규합등 4246년부터 4252년 기미 독립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선생은 만사를 진두지휘하시다 피체되어 3년간의 영어의 몸이 되시다. 출옥후에도 국권회복의 단심으로 상해의 임정과 연락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대동신보 독립신문의 발간등 선생의 활동은 눈부시었다. 4236년 일본의 야욕이 극에 달하였을때 선생은 오직 조선독립의 일념으로 금광개발로 병력확보와 군수물자 조달에 전력하시다. 4287년 조국광복으로 상해임시정부가 환국됨에 백범 김구선생이 귀국하자 선생은 백범선생과 상무사를 조직 부령으로 피선되어 신탁통치반대운동과 통일정부수립에 진력하시다. 그러나 만사휴의라 4283년 6월 25일 민족동란으로 피신중이든 선생생은 동년 8월 9일 부인 곽동순여사와 아들 국현 조카 상현등 일가족이 인민군에 피납되어 한강백사장에서 무참히 종언하니 오호통재라 시에 선생 수 67세라. 그 후 대동단사건으로 판결문이 43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