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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였다. 남편을 따라 순절하려다가 어른들의 뜻에 따라 생각을 바꾸었지만 불경이부의 굳은 마음으로 눈물을 보이지 않고 가사를 보살피는 동안 시동생이 술병으로 세상을 버리고 시부모는 노환으로 가세가 백척간두에 이르렀다. 마지못해 공주 친가로 돌아오니 초당공의 은사근사 마음과 힘을 다해 주심은 또한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유인은 그 뜻에 맞추어 나물캐고 김매며 가축도 길러 약간의 논밭과 삼칸의 토담집을 마련한다. 유 시어머니 모심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앞서서도 손수 베를 짜서 시부모님의 수의 염습을 갖추기도 하였다. 시댁 종숙부 일동씨는 옛날 행금과 범절을 지키고 존중하는 분 이었다. 이 유인이 청상과부로 일점혈육도 없이 굳은 정조를 지킴에 감동하고 가엾게 여겨 그의 손자 기년으로 양자를 하게하니 어릴때부터 데려다가 가르치고 기르기를 소생과 다름이 없었다. 기년이 성장하자 공사에 취직되어 유인을 모시고 살림하며 아내도 맞이하여 효양을 다하고 손자 손녀 기르면서 단란한 가문의 생활을누리다가 향수 78세에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돌아간후 5년에 친정 여동생 김실증현이 유인의 효열비를 세우기위해 거금을 모아 내놓고 유인의 동생 삼종숙 동구씨와 아들 김기년군이 성우에게 글을 부탁하기에 선고 현민선생이 지으신 유인의 환갑 수연서문과 공주향교 표창을 참고하여 이 글을 만들게 되었으나 모두가 직접 보고 느낀 일이다. 오호라 효도와 열행이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덕행이지만 고금천지에 잘 실천하는 이가 새벽별처럼 희귀한데 더구나 지금같이 윤리강상이 땅에 떨어져 암흑세계가 되고 있는 때 이겠는가. 그러나 하늘의 진리와 인간의 본성은 끊어질수없는 것인즉 이 유인의 효열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일시적 감상대로 순절하기보다 긴긴 세월 천신만고를 견디면서 부모 조상의 가르침에 빛을 더한일은 더욱 존경스러운 일이아닌가. 그러기에 이 비를 성암선생 사우 주변에 세우는 바이다. 끝으로 가사를 지으니 아! 효와 열은 사람의 도덕에 가장 큰 일. 이를 행하면 사람되고 아니면 사람일수 없나니 어찌 예와 이제 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