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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가하나 내 어찌 나라와 조상을 욕되게 하겠는가」라고 답하자 선생의 면전에서 내준에게 더울 모진 혹형을 가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그들을 크게 꾸짖고「충의를 위해 우리 부자가 다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하시고 시를 지어 절의를 보인 후 단정히 앉아 대학 중용을 암송하셨다. 엄동하 옥중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하기를 6일, 그 의기는 꺾이지 않았으나 연로하고 병이 깊어 잠시 병보석 연금에 처해지자 선생은「황제가 욕을 당하였으나 신하의 도를 다하지 못하고 쇠락하여 더 이상 보은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음을 한탄」하는 임종시와 우시를 남기고 음독자결 하시었다. 이 때가 1910년 음력 12월 7일 향년 68세였다. 선생은 제자들과 유림에 의해 사육신과 뜻을 같이 한 익안대군의 증손 옥계도정공과 함께 충곡서원에 배향되셨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고 1979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395호에 안장되셨다. 내수공의 자는 원백이요 호는 양은이다. 부친의 뜻을 이어받겠다 다짐하고 일제의 민적을 불사르기를 여러 차례 결국 구속되어 그 연유를 묻자「너희 국민이 되지 않으려 그리하였다」답하고 서울로 이송된 후 8일간 단식하셨다. 1916년 선생은 무장봉기 할것을 결의하고 고종황제께 고하니 황제는 좌찬성의 위를 제수하고 밀지와 마패, 인장을 시종관 전용규를 시켜 하사하셨다. 이에 선생은 공주 의병장 이용규, 이만직, 윤병일, 동생 내준 등과 함께 실행을 준비하였으나 누설되어 구속되셨다. 선생은「먼저 5흉 7적을 참하고 네 총독을 참한 후에 네 나라에 쳐들어가 씨도 없이 하려했다」말하여 수십일의 고문 끝에 내준과 함께 전라도 기자도로 1년간 유배되셨다. 삼일운동 직후 곽종석, 김창숙 등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에 유림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셨다. 또한 민족 대단결 항일투쟁을 표방한 대동단의 유림대표로 추대되어 대동단이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데 민족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셨다. 1919년 4월에 임시정부를 위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 중 1인으로 참여하셨다가 종로서에 구금, 옥고를 치렀다. 그해 11월 대동단이 발각되자 포위망을 피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1921년 5월경 2,000여원의 군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23년 8월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243호에 안장되셨다. 내준공은 회천 선생의 차자로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방하여 반상의 구별이 없고 상하간 교류가 넓었다. 부친 순국 후 형님과 의병봉기 모의시 자금과 의사를 모으던 중 체포되어 유배형을 당하였고 임정수립 국민대회 참가, 상해임정 군자금 모집 등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