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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순 순국선열의 아드님이신 이내수는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1906년 홍주(洪州)의 민종식(閔宗植) 의진(義陣)에 참가한 바 있는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에도 계속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다가 1916년 7월 연산(連山) 한양리(漢陽里)의 자신의 집에서 역시 홍주 의진 출신인 이용규(李容珪)·이만직(李晩稙)·윤병일(尹炳日) 등과 함께 거의(擧義)를 결심하고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배신자의 밀고로 사전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7년 4월에 피체된 뒤 전남 기자도(箕子島)로 1년간 유배형을 당하였다. 그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용규 등과 함께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추진하는 한편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 등의 유림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137인의 유림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한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서울에서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의 유림단(儒林團) 대표로 추대되는 등 동단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대동단에서는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층의 인사들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펴갔다. 한편 대동단은 3·1독립운동처럼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33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는데, 이때 그는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으로 서명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말 대동단 발각 이후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1921년 5월경 논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포섭한 뒤 2천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上海)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활동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3년 8월 14일 공주지방법언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