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page


13page

無貳齋 吳先生 剛杓 殉義紀蹟碑(무이재 오선생 강표 순의기적비)
13page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신하의 도리로 나라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살아 남을 수 있으랴." 하고 오적을 토주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청나라 상인으로부터 아편을 구해 공주향교 명륜당에 들어가 대성통곡한 뒤에 약을 먹었으나 반사(半死)의 지경에서 가까스로 소생하였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광사(狂士)라 하였다. 이후 오강표는 세상에 살 뜻이 없다 하여 명강산(明岡山 : 공주 무성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몸에는 항상 독약을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전해 듣자 그는 절명사(絶命辭)를 지어 선산과 스승 임헌회의 묘에 고유한 후 공주문묘(公州文廟)에 들어가 글을 벽에 붙이고 대성통곡한 후에 향교 안에 있는 강학루(講學樓)에 올라가 자결하였는데 이 때가 1910년 10월 16일이었다. 출처 : 충청투데이
13page

무이재 선생의 순절비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었다. 오강표 선생의 순절비는 이 곳 외에 3곳에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었다. 금산군 남이면 매곡리(보훈처 사이트에는 남일면 신천리) 연기군(현 세종시) 남면 갈운리 마을입구(묘소 인근) 이곳의 비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출생하신곳인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 산 속에도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연기군의 순절비는 탐방시에 찾을수가 없었다. 연기군에 있던 묘소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